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이장우 목사(늘푸른 교회)/언약을 따라서

28강. 십자가(1)

Hebrew 2022. 11. 11. 14:23

28강. 십자가(1)

 

 

그 동안 새 언약이라는 말로 구약과 신약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기에

십자가로 말해도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십자가의 의미를 새 언약과 연결하여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의 십자가란!

지금 우리가 십자가라고 말을 하는 것과는 너무나 엄청난 시공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공개적인 교수형을 처한다고 하면 얼마나 끔찍한 모습이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한 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 때로는 수 백 명이 십자가에 공개 처형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로마를 반역한 자들 중에서 이방인들을 십자가형에 처형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침 뱉고 고개를 도리질 하면서 비웃고 조롱하며 모두가 실패하였다고 돌아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언약을 통한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면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우리는 그저 수많은 종교 중에서 하나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종교란 인간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하는 것도 인간이 이루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

또는 신과 인간이 상호 협력하여 원하는 것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증거 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의 길은

결코 인간의 능력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10:34-39절입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여기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마치 자기 금욕적인 행위로 욕망을 억제하는

불교적인 자기부인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기부인은 얼마나 철저합니까? 세속과 단절하기 위하여 가정도 세상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산으로 들어갔지만 그곳이 다시 세상의 권력까지 흔드는 권력이 되어버립니다만

이런 자기부인을 하는 종교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자기부인의 말씀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저 세상의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금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자기 부인 또는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애를 먹이는 남편이나 아내 또는 시댁을 십자가라고 합니다.

때로는 가난이나 고질적인 질병을 십자가라고 합니다.

그런 것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인생들이 마땅히 지고 가야할 형벌입니다.

사람의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죄로 인한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 같이 가는 길입니다.

 


허면 과연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행동을 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유익이 있을 때 행동합니다.

그 모든 행동의 근원은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을 확대하면 가족이며 좀 더 확대하면 국가이고 지구입니다.

가족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인류를 위하여 희생하면 영웅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은 무엇을 주기위하여 오셨다고 하십니까?

서로 사랑하고 화평하라고 오신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자식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서로 불화하게 되며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마태복음 10:37절)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마태복음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 하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할 때 부모나 자식은 버리고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목숨조차 미워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의지로는 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14:25-27절입니다.

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일이 과연 인간에게 가능합니까?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의 목숨조차 미워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서 영생을 얻고자하는 것도 결국은 자기 사랑의 연장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자기금욕적인 내용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지고 갈 수 없는 것임을 확인시키시는 자리입니다.

 

정말 그러한지 마태복음 16:16절부터 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베드로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게 된 것은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고 합니다.

 이 고백 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실 때에

베드로가 듣고 항변합니다.

그런 일이 주께 일어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합니다.

왜 이러실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한다고 십자가에 죽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사탄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16: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한다고 한 말이 사탄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았다면 이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십자가란 말 그대로 사형형틀입니다.

네가 나를 위해 하려는 것은 죽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내가 죽은 것 같은 너를 다루고 이끌어 가겠다는 주님의 의지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다른 사람은 다 예수님을 부인하여도 자신은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부인하실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새벽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을 부인하고 나서 닭이 울었습니다.

그 닭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자신이 주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한 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다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아니하도록 예수님께서 기도하십니다.

이제 베드로의 남은 생애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주도적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베드로에게 덮쳐오는 방식입니다.


 요한복음 21:18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제는 내 뜻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끌려간다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뜻입니다.

 

'◈이장우 목사(늘푸른 교회) > 언약을 따라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30강. 십자가(3)  (0) 2022.11.11
29강. 십자가(2)  (0) 2022.11.11
27강.새 언약(7)  (0) 2022.11.11
25강.새 언약(5)  (0) 2022.11.11
24강.새 언약(4)  (0) 2022.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