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이장우 목사(늘푸른 교회)/언약을 따라서

30강. 십자가(3)

Hebrew 2022. 11. 11. 14:24

30강. 십자가(3)

 

 

 갈라디아서 6:11~16

11.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칼빈의 갈라디아서 강해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양식(良識)이 있는 사람 백 명을 면담해 보면

  그 가운데서 로마 가톨릭에 잘못이 있다고 인정을 하려는 사람 한명을 찾기가 힘듭니다.”

 

칼빈이 이런 말을 한 배경은 가톨릭의 잘못된 것을 개혁한 사람이기에 이런 말을 합니다.

성경에서 죄인 된 인간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하여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이미 2천 년 전에 결정 난 사항입니다.

 

 

사도행전 15:1-5절

1.어떤 사람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한 곳에 내려와서는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행하여야 구원을 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이 율법과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런 논쟁에 대해서 사도들과 장로들의 회의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사도행전 15:10-11절을 봅니다.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베드로의 말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베드로 자신도 믿지 못한 사실이었지만

  그가 성령에 이끌려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결과를 자신이 보았기 때문에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랬던 초대교회가 세월이 지나면서 세상의 힘을 가지고 군림하는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핍박에서 벗어났습니다.

오히려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온갖 이교적인 것이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절기와 예식과 멋진 건물을 지으면서 권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오직 은혜라고 말하지 않고 인간의 행위를 추가시키기 시작합니다.

오직 은혜라고 하면 사람들의 헌신과 열심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에 인간의 행위가 보태어져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시키든지 아니시키든지 간에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구원을 약속하면서 인간의 행위를 추가시킨 것은

교회가 힘을 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캄캄한 흑암의 역사가 천년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중세 1000년입니다.

 

 

이때 종교개혁자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내용을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의 원리로 돌아가자고 한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런 자들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이 땅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은혜로만,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십자가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합니다.

그런데 그런 구원은 영적인 구원이고,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죽은 후 천국 가서 더 많은 상을 받으려면 헌신과

충성과 봉사의 행함이 보태져야 한다고 합니다.

중세 가톨릭이 타락하여 간 모습이 지금 이 땅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14절을 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성경 66권이 전부 십자가만 말한 것이 아닌데 왜 바울사도는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는지

반발이 나오십니까?

 반발이 나온다면 이런 사람은 아직도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고 육체를

자랑하고 싶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엄격하게 말하자면 아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까?

새 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자기 정체성입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이 말씀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볼 때에 죽은 세상으로 보입니까? 아니면 아직 살만한 세상으로 보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에 죽은 자로 봅니까? 산자로 봅니까?

세상이 우리를 볼 때 죽은 자가 아니라 아직 펄펄 살아서 악착같이 썩어질 세상의 것들을

 세상의 사람들보다 더 많이 거두어들이려고 하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 안에 반발이 일어난다면 예수님을 죽인 자들과

한 통속 이라는 증거입니다.

 

 

(누가복음 23:10-12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예수님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로마의 정치꾼인 헤롯과 빌라도마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됩니다.

두 사람이 친하게 되었다는 것은 공동의 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공동의 적, 공공의 적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음을 합하여 죽여 버린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사도행전 4:26-28절을 봅니다.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여기에 동의하고 합동한 자들에 오늘의 우리도 포함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바로 오늘의 우리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믿는 것은 사람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주의 성령이 임하여야 만 되는 일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죽였기에 자신이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에게 조금만 손해가 되면 온갖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죄인임을 알고 고백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에 따라 되는 것이기에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 할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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