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이장우 목사(늘푸른 교회)/언약을 따라서

29강. 십자가(2)

Hebrew 2022. 11. 11. 14:23

29강. 십자가(2)

 

 

고린도전서 1:18~25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이루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힘이 부족하니 주변의 힘을 동원하고 심지어 신의 힘까지 동원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합니다.

주변의 힘을 동원하는 것도 힘이 들지만 신의 힘을 빌리려면

더 지극한 정성을 바쳐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결국은 자기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만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영광이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도를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십자가의 도라는 말씀이 있고 이 십자가의 도는 세상의 지혜로 보면

거리끼고 미련한 것이라고 합니다.

런데 이 미련하고 거리끼는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 전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굳이 사람들이 잘 알아듣고 좋아하는 방법으로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이 꺼려하고 싫어하는 십자가의 도로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인간 구원에는 사람의 공로가 전혀 개입될 수 없으며

직 주님의 일하심으로만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린도 교회처럼 파벌이 생기고 자기 자랑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주변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도 방법들이 있습니다.

전도방법을 소개하면서 자기들의 방법이 미련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전도방법을 적용한 교회들이 확실하게 성장하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런 방법들이 너무 많아서 다 말하기도 곤란할 정도입니다.

그러한 내용들을 살펴 보면 사람들의 필요를 파악하고 그 필요를 채워주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방법입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은 또 걸림돌이 됩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해버린 것입니다.

스스로의 지혜로 어떤 인간도 스스로 십자가를 알고 믿게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도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구원 얻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멸망 받는 자들에게 십자가란 미련하게 보여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두 편으로 나누어 버리시는데

것은 십자가로 나누어 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고서 미련하게 여기는 자들은 멸망 받는 자들이고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는 자는 구원받는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이나 구원해보라는 조롱 속에 힘없이 약하심으로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신명기 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받아 죽은 것이라고 하였기에

유대인들이 보면 정말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일 뿐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와서 강한 능력으로 자기 민족을 구원하여줄 표적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냥 십자가에서 달려죽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내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수많은 표적들을 행하셨지만 정작 보여주시고자 하는 최종의 표적은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 삼일을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땅속에 삼일을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표적이 보여줄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도는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를 하나님께서 미련하게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2절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왜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입니까?

거리낀다는 것을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능력이 아니라 실패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조차 십자가 앞에서는 다 돌아선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능력 있는 메시아가 아니라

왜 십자가를 지는 메시아인지를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헬라인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입니다.

헬라인들의 신의 개념으로는 신이 육체를 입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다는 것

자체가 미련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세상의 삶의 원리란 인과율의 세계입니다.

자기의 행위를 자기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내가 선행을 하면 그 보상을 내가 받는 것이고 내가 악행을 하면 내가 벌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원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어려서부터 보는 동화나 어른들의 민담들이 다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면서 선하고 착하고 바르게 살자고 합니다.

그것이 윤리요 도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도 윤리와 도덕의 연장선상에서 인간이

서로 착하게 살도록 만드는 기능으로 보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면 신이 복을 주고 죽어서도 좋은데 가고 나쁘게 살면

신이 벌을 주고 죽어서도 나쁜데 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평생 강도짓을 하다가 사형당하기 직전에 “예수님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으며 또 그 고백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라는 대답할 수 있는지?

세상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강도가 천국 간 것을 믿으십니까?

그게 세상 지혜로 될 말입니까?

평생토록 율법을 지키고 금식하고 전도하며 죄를 짓지 않고 살았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으로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아니 믿고는 사람의 지혜나 실력으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4절입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임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은 입지 않고서는 믿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는 너보다 낫다는 자기 자랑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느니,

나는 어느 파니, 하는 것이 나올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자랑이 나온다는 것은 아직도 십자가의 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이지요!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란 날이 가면 갈수록 그리스도만 자랑되어질 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이의 지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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