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의 첫 선언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처음 나오는 말이 히브리어로 ‘베레쉬트’인데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책의 제목으로 삼았다. 70인역을 번역하면서 헬라어 ‘게네시스’(기원, 근원)라고 썼기에 영어로 Genesis로 번역하였고 그 이름을 따서 우리 성경에서는 창세기(創世記)라고 붙였다.
우주 혹은 세상의 기원에 대한 문제는 인류 역사 이래로 오랫동안 수 많은 사람들이 고민한 문제다. 수 많은 철학자들의 논쟁거리가 ‘세상의 근원이 무엇인가?’ 또는 ‘사람의 기원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동안 고민하며 토론해 왔지만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 중에서는 우주의 기원이나 세상의 시작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논쟁의 결말을 맺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천지 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천지 창조의 기원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것인가? 히브리서에 보면 이렇게 기록한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믿음’으로 안다고 하였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가? 믿음은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그런데 믿음으로 천지 창조를 받아들인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 믿음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히 12:2). 그렇다면 천지 창조에 관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각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천지 창조가 하나님께서 홀로 말씀으로 이루신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성경은 이미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선언을 가지고 출발한다. 성경의 시작을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한다. 우리의 신앙이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부터 믿어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만 믿는 것은 유대교이고 창조과학의 신앙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요 성도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졌다면 그분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태초”라는 말의 ‘베레쉬트’란 ‘베’(~안에)라는 접두사와 ‘레쉬트’(첫째, 처음, 시작, 최초, 최상의 것, 근원)의 합성어인데 이 ‘레쉬트’는 ‘로쉬’(머리, 꼭대기, 우두머리, 시작)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즉 “태초”란 하나님이 계시기 시작한 것이 태초라는 말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기원, 근원이 창조하신 분의 머리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다(출 3:14).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이렇게 선포하셨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사 43:10)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히브리어로 표현한 ‘엘로힘’이란 세상에서 사람들이 섬기고자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엘로힘은 ‘엘’(하나님, 신, 강한 자, 힘)에서 유래한 ‘엘로아흐’의 복수형으로 ‘하나님, 신, 신들’을 뜻한다. 대체적으로 단수 동사나 단수 형용사로 함께 사용된 것을 보면 복수로 표현하여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출애굽 당시의 고대사회에는 신들이 많았다. 애굽만 해도 바로 왕을 태양신의 아들로 믿고 있었고, 산도 신이며 바다나 나일강도 신이었다. 심지어 동물들도 신이었다. 이 신들의 세계에는 남신과 여신이 있고, 이들은 서로 사랑하고 질투하며 짝을 지어 번식한다. 또한 그들에게는 위계질서가 있고, 각자의 맡은 역할이 있다고 믿었다.
신들의 이해에 대한 이런 배경에서 모세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창세기를 기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의도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애굽의 어떤 신들보다, 앞으로 들어갈 가나안 땅의 어떤 신들보다 태초 이전에 스스로 계시며 유일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느냐 하면 천지를 지으신 분이라는 점에서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지만) 세상의 어떤 신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고 머리이신 그분께 속했다는 것을 계시하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1-4)
여기 1절의 “하나님”을 히브리어로 ‘엘’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단순히 엘로힘만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에 끝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하나님이 언어도 없고 말씀도 하지 못하시는 분이라는 말이 아니라 천지 만물을 통해 하늘의 장막을 베푸심으로 말씀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그 말씀을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선포한다.
1 태초에 (그)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그)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그)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우리 성경에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관사로 명확하게 그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즉 구약에서 약속된 그 말씀이신 분이 구약에서 창조하신 그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 하나님은 구약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면 함께 계셨던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분을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설명한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 함께 계셨다고 선언하였다.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1-24)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로 선포하신 내용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 안에 하나로 만드시는 것이 자신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것을 밝히셨다. 즉 하나님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로 자기 백성들을 불러 하나로 만드시는 것임을 나타내셨다. 이를 두고 바울 사도는 “아들들”로 만드시는 것이라고 하였고(롬 8:14, 엡 1:5) 같은 의미로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히 2:10-12)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이 히브리어로 ‘바라’라는 말이다. 완료형으로 기록되었다. 히브리어에 ‘만들다’라는 단어가 ‘바라’ 외에도 ‘아사’, ‘야차르’라는 말이 있는데 흔히들 바라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고 아사는 유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고 야차르는 조성한다는 뜻으로 한정시켜 이해하려고 하나 중요한 것은 문맥에서 하나님과 관련되어 어떻게 쓰이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참고 사 45:7).
“천지”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하늘과 땅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하늘과 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히브리어로 ‘에트 핫솨마임 웨에트 하아레츠’라는 말인데 직역하면 ‘그 하늘들과 그 땅을’이라는 말이다. 앞에서 말씀한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관사를 붙이고 있다는 것은 특별한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하늘과 땅이란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신 특별한 현장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단순히 우주와 이 지구를 만드셨다는 정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현장으로 하늘과 땅이다. 그래서 그것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5-18)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롬 11:36)라는 선언은 다시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이다. 역사를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역사를 끝내실 수 있는 분도 역시 하나님이다. 역사를 시작하고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분이 또한 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선언이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3).
우리는 성도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사람이 만들어 낸 이 거대한 과학 기술 문명의 위력에 압제당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거기에 우리 삶의 주권을 내어 맡기고 있다. 우리의 생활에서 과학적인 문명이 개입되지 않는 부분이 어디에 있는가? 많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없으면 불편하고 살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과학의 발달이 우리의 눈에 너무나도 크게 보이고 생활의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기에 모든 삶에서 과학으로 증명된 것에 신뢰감을 가지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엄밀히 말하면 과학 자체가 가설과 허구에 근거하여 출발한 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과학으로 증명된 하나님! 이는 십자가를 왜곡하고 가리려는 마귀가 양산해 놓은 또 다른 우상이다(2022052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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