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영대 목사 (주성교회)/창세기 강해

4.창세기 1:3~5 빛과 어둠

Hebrew 2022. 12. 8. 21:19

창세기 1:3-5

빛과 어둠

 

 

성경이 창조에 대한 기록을 하였지만 구체적으로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성경 전체의 비중에 비하면 창조의 기록은 창세기 1-2장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창조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창조신앙을 심어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창조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정형, 법칙, 원리로 만들어 그 속에 넣어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간격설이라든지 점진적 창조설 등 오늘 본문부터 나오는 계속 반복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용어들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고 한다든지 “날”(히, 욤)에 대한 정의를 신학적으로 또 과학적으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창조의 구체적인 것을 설명하고 우리의 의문을 해소시키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2절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이 혼돈과 공허, 흑암의 깊은 물이 있는 것과 하나님이 물 위에 계속 움직여 일하시는 것을 대조하여 성령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우리는 지난 강론에서 살펴보았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3-4a절)라고 하였다. 직역하면 ‘하나님이 빛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빛이 존재했다. 하나님이 그 빛을 유심히 보셨다. 왜냐하면 그것이 선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우리 성경에는 “빛이 있으라”라고 명령형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기원법(희구법, 소원법)이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빛이 있었고”라고 하였는데 그 빛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이미 2절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이미 물의 얼굴 위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 작업을 하시기 위해 움직이고 계신 성령께서 빛이 있게 하신 것이다.

넷째 날에 광명체를 만드셨기에 태양이 빛을 비추일 수 있었다면 사실 해와 달과 상관없이 존재할 수 있는 빛이다. 그래서 빛을 비추는 이 땅의 광명체가 없는 상태로 하나님 나라를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계 21:2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5)

 

 

우리 성경에 “보시기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아’인데 ‘보다, 바라보다, 조사하다’라는 말로 단순히 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닌 유심히 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좋았더라”라고 번역한 말은 히브리어로 ‘토브’인데 ‘좋은, 선한, 즐거운’이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지으신 빛이 선했기 때문에 유심히 보셨다는 것이다. 결국 빛에서 선함을 보셨다는 하나님의 의도는 빛의 창조를 통해 자신의 생명을 나타내려고 하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생명의 빛이라고 선언하면서 사망에서 건짐을 받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한다.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시 56:13)

 

 

빛을 생명과 연관하여 말씀하였다는 것은 빛을 창조하심으로 그 빛을 통해 생명을 설명하고 보여주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 생명이 하나님의 선이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생수가 되는 물 위를 품고 일하고 계시는 것을 통해 창조된 빛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보여주기를 원하신 것인가?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한다.

 

 

5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5-7)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6)

 

 

다윗이 언약 안에서 원했던 생명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마태는 선언한다. 그래서 요한은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씀한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1-5)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그리고 그다음에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4b-5절)라고 말씀한다. 혹자는 어둠은 하나님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어둠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셨다고 말하기도 하나 이미 2절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미 혼돈과 공허, 흑암의 심연을 창조하셨다. 다시 말해서 물이 있는 땅을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로 만드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대조해서 하나님의 영이 이루실 일을 나타내셨다. 그래서 이사야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사 45:7)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함께 하지 않는 상태가 혼돈과 공허이고 흑암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참고 렘 4:23).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나누사”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달’이라는 말인데 ‘나누다, 분리하다, 구별하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단순히 나눈 것이 아니라 빛은 빛으로 구별하셨고 어둠은 어둠으로 구별하셨다는 것이다. 이 표현은 나중에 성막에서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한 것으로 쓰였고(출 26:33), 이스라엘이 열방들로부터 구별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레 20:24, 26). 또한 이스라엘은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여야 했다(레 20:25). 이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고자 하셨다(레 11:45). 결국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구별하여 생명과 생명이 아닌 것, 거룩과 비거룩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궁극적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하여 구별되는 것을 계시한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1-24)라고 하셨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데 인간은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없기에 어둠에 거하는 존재 자체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고 어두운 눈으로 그저 재물만 쳐다보는 죄인이라는 것을 폭로하신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에서도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인간이 어두움 자체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의 존재가 되게 만들어 주시지 않으면 어둠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십자가란 어두움인 자기 백성들을 빛의 존재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역사이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에 이르셨을 때 이 땅은 잠시 어둠에 휩싸였다(마 27:45/막 15:33/눅 23:44).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이 땅은 어둠의 상태라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먼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선언하시고 십자가를 향해 가셨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바울 사도의 서신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쳐주시는 표적이 나오는데 제자들은 그가 죄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 9:5)라고 하셨는데, 맹인이 볼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일이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는 상태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히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없다면 인간은 어둠이요 밤이며 그것은 곧 죽음의 상태이다. 오직 십자가에 의해 죽음에서 생명의 빛으로 전환된 이 은혜를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에서 보여주시는 것이다(2022060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