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영대 목사 (주성교회)/창세기 강해

6. 창세기 1:9-13바다와 땅

Hebrew 2022. 12. 8. 21:49

창세기 1:9-13

바다와 땅

 

 

창세기 1-2장이 창조에 대한 기록이라고 하지만 오늘 본문의 셋째 날 내용을 보면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창조를 하신 것이 아니다. 있는 것을 나누시고 땅이 식물을 내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실제적인 창조가 없다는 점에서 셋째 날은 창조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꼭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만드신 것만 창조라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있는 것을 나누고 조성하시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이루실 창조를 보여주신다는 측면에서 생각하자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또한 셋째 날에는 식물들을 만드셨는데 식물이란 태양에 의한 광합성 작용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넷째 날에 태양을 만드시기 전까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들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잘못 만드신 것이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인데 하루 정도 식물이 살 수 있도록 하셨는데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기에 창조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창세기의 창조는 우리가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많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창공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어 구별하신 하나님께서 그 아래의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땅을 만드신 것이 셋째 날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9-10절)라고 하였는데 바른성경을 보면 이렇게 번역하였다. “하나님께서 ‘하늘 아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마른 곳이 드러나라.’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께서 마른 곳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우리 성경에 “천하의 물”이라고 하였는데 궁창(하늘) 아래의 물을 말한다. “뭍”(히, 얍바사)이라고 번역된 말은 바른성경에서 번역한 바와 같이 ‘마른 곳’이라는 뜻이다. 물을 한 곳으로 모으고 마른 곳이 드러나게 하셨는데 한 곳으로 모은 물을 바다라고 하셨고 마른 곳을 땅이라고 하셨다. 이 단어는 일차독자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이해되는 표현이다.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출 14:21-22)

 

22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23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24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 4:22-24)

 

 

바닷물이 물러가서 드러난 마른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 마른 땅을 통해 들어간 약속의 땅, 그 땅에서 이스라엘은 홍해와 요단강을 건넌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그곳이 말씀(율법)에 의해 살아가는 땅이 된다. 이런 점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 땅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8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사 45:7-8)

 

 

메시아가 오시기 전까지는 닫힌 땅이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열 수 없는 땅으로 주신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 죽음을 통해 얻게 되는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죽음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이스라엘이신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5-17)

 

 

예수님께서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자신의 죽음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막 10:38, 눅 12:50). 그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선언을 하시고 물에서 올라오시니 하늘이 열려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창세기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 즉 십자가에서 대속을 이루시는 모든 의, 그것을 선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땅이란 하나님께서 친이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시는 곳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바다”(히, 얌)란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의 상황을 모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27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출 14:27-28)

 

 

일차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마른 땅으로 건넌 후 애굽 사람들이 사망하는 곳으로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바다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이 성막을 만들 때 제사장의 정결을 위해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었는데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다고 하였다(출 38:8). 그리고 솔로몬 성전에서는 이 물두멍을 “바다”라고 칭하였다(대하 4:6). 제사장이 정결을 위해 죄인과 같이 되는 것을 통해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과 같이 되신 것을 상징하고 있다. 이것이 예수님 오시기까지 그 경계를 하나님께서 정하셨다고 시편은 밝혀준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시 104:9)

 

 

복음서에 보면 갈릴리 호수를 대체적으로 ‘호수’(막 7:31, 요 21:1)로 표현하지만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표적이나 물 위를 밟고 걸으신 표적에서는 ‘바다’라고 표현하였다(마 8:24-27, 14:25-26, 막 4:39-41, 6:47-49, 요 6:16-25). 예수님은 이런 표적을 통해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죄악 된 세상, 곧 마귀의 권세를 밟으시고 십자가로 온전한 승리를 이루실 것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실체를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더라(계 13:1)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계 15:2-4)

 

 

“불이 섞인 유리 바다”란 출애굽 때 이스라엘이 성막을 만들면서 여인들의 거울로 만든 물두멍, 곧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불이 섞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는 뜻이다. 그 심판을 통과한 자들은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심판을 통과한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 양에 의한 것이기에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른다. 이들이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자들이다(계 7:14).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얻어 아들로 만들어지는 땅은 무엇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가? 그것을 보여주는 말씀이 그 다음 구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11-13절)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땅이 낸 것은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인데 사람을 지으신 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29-30)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것에게 주신 것이 풀이고 사람에게 먹을 거리로 주신 것이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이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 4:26-29)

 

 

“씨”(히, 제라)는 ‘자손, 후손’을 의미한다(창 17:7-8).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씨”는 “말씀”이라고 하셨다(막 4:14). 그렇다면 사람에게 먹을 거리로 주신 “씨 맺는”, “씨 가진”것이란 사람이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 된다.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신 하나님께서 땅적 존재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의 후손에 대한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밝혔다(갈 3:1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먹는 자가 사람이고, 풀을 먹는 자는 짐승이요 새와 땅에 기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새 사람으로의 창조를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0-11)

 

(2022061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