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영대 목사 (주성교회)/창세기 강해

3.창세기1:2 깊음의 물과 그 물

Hebrew 2022. 12. 8. 21:16

창세기 1:2

깊음의 물과 그 물

 

창세기 1:1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위대한 선언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창조 자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천지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의도하신 것이 근원이시며 머리요 으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우리는 지난 강론을 통해 확인했었다. 이제 창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언급한다.

이 말씀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문점을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본문이 다 그렇지만 특히 우리는 창세기의 처음 몇 장을 통해 창조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을 다 해결하려는 시도로 성경을 대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창조의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빠짐없이 설명하려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나타내신 자기 계시이기 때문이다.

천지 창조에 대한 기록을 말씀으로 주신 것은 한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루고자 하시는 거대한 뜻 안에서 피조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도 내가 가진 궁금증이 다 해결되어야 믿겠다는 식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진리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확인하도록 하시는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본문을 대해야 할 것이다.

본문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고 선언한다. 사실 이렇게 번역된 말씀만으로는 성경이 나타내고자 하는 그 본뜻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직역을 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그 땅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존재했다깊은 물의 얼굴 위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움직이고 계셨다그 물들의 얼굴 위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이 우주냐 지구냐 하는 논쟁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사실 성경학자들 가운데서도 창조가 몇 번이냐 하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창세기 1:1과 2절 사이에는 엄청난 갭이 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이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라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보고 처음 창조를 루시퍼가 혼돈과 흑암 가운데 있게 하였다는 주장 외에도 최근에는 복음을 설명한답시고 실제 창조가 아니라 허구적인 것을 기록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창조를 설명한다는 주장까지 많은 이론이 있다.

그러나 창조에 대한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칠 수 있기에 하나님의 창조 자체를 인정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 싶은 것이 성경 전체 속에서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직역한 말씀을 가지고 이해하자면 1절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선언에 의해 구체적인 창조의 내용을 2절부터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은 그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의 영에 의해 운행되고 있다는 것과 대조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시는지가 드러난다.

“혼돈”(히, 토후)이란 ‘형태가 없음, 텅빔, 없음’이란 뜻이고 “공허”(히, 보후)란 ‘텅빔, 황무지’를 의미하는데 보통 같이 사용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렘 4:22-28). “흑암”(히, 호쉐크)은 ‘어두움’을 뜻한다. 이 세 단어를 통해 말씀하고자 한 것은 “혼돈”은 형태가 없다는 것이고, “공허”는 내용이 없으며 “흑암”으로 생명이 없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 표현을 통해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는 상태임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창조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다음 묘사를 통해 하나님의 영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와는 대조된 하나님의 영이 어떤 일을 하시려고 물 위에 움직이고 계신다는 것이다. “운행하시니라”라는 말은 ‘라하프’인데 ‘비상하다, 배회하다’라는 뜻으로 계속 움직이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같은 단어가 성경에 딱 한 곳 있는데 이 말씀을 통해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 32:11-12)

 

“너풀거리며”라고 번역된 말이 ‘라하프’이다. 독수리가 새끼들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비유로 쓰인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표현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보호하심으로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기 위한 것을 나타내셨다(참고 출 19:3-6). 그렇다면 출애굽의 구원에 비추어봤을 때 창조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에 하나님의 영이 계속 움직여 일하셔야 되는 땅이라는 의미이다. 즉 이 땅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품고 일하기 시작하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얼굴 위에서’라고 표현하였을까? 얼굴이란 둘과의 관계에서 얼굴을 통해 긴밀한 관계가 맺어진다. 창세기 32장에 보면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브니엘’이라고 고백하였는데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창 32:30-31).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은 인간이 거룩함을 마주할 수 없는 죄인임을 말씀한 것이다(참고 출 33:2023). 이런 점에서 깊음의 물은 그 얼굴을 대할 수 없는 상태이지만 하나님의 영이 품으면 그 얼굴을 대할 수 있는 물이 된다는 것이다.

“깊음”(히, 테홈)이란 ‘깊은 물, 바다, 심연, 큰물’을 의미한다. “수(물)”(히, 마임)이란 ‘물, 흐르는 물, 생수’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심연과 대조된 물로써 앞의 문장에서 물에 대한 언급이 없기에 정관사를 쓰고 있다는 것은 ‘특별한 물’을 의미한다. 따라서 심연, 깊은 물은 흐르는 물이 아니며 밖으로 드러나 주어지는 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이 일하신 것으로 드러난 그 특별한 물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 무엇일까? 물은 생명의 근원으로써 예레미야 선지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하나님 자신을 살아 있는 물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서에 보면 이렇게 예언한 것을 볼 수 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이사야 11:1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하면서 여호와의 영이 강림한 자에 의해 공의로 심판이 이루어져 악인을 심판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말씀하신 문맥에서 이 말씀을 하셨다. 그러므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라는 말씀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말씀)이 물로, 세상이 바다로 상징된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무너뜨려 심판하고 말씀이 온전히 충만하게 채워지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진술이다.

깊음의 수면은 대할 수 없는 혼돈, 공허, 흑암의 상태이지만 하나님의 영이 그 물을 흘러나오는 생수로 만드시고 일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생수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창조 본연의 목적이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이렇게 선포하셨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일이 영원한 상태로 살리는 일이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19-21)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4-25)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번역하였는데 정확하게 표현하면 ‘아들의 음성으로’ 들을 때가 온다는 뜻이다. 즉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면 그것이 구원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완전한 창조이다. 창세기 1:2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이 창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시초부터 종말을 알린다는 것은 창조가 이미 종말을 전제하고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즉 말씀을 온전히 성취할 메시아가 임하면 그것을 종말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다 드러난 것이 종말의 상태이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종말이 창조를 앞선다고 표현하였었다. 결국 창세기는 우리에게 창조의 구체적인 내용을 다 기록하여 상세하게 알려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새로운 창조를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자기 백성들을 하늘에 앉히시는 것, 엘로힘으로 참여시켜 생명을 누리게 하시는 이것이 은혜로 된다는 것을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다.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5-8)

 

(2022052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