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영대 목사 (주성교회)/창세기 강해

5.창세기 1:6-8 아래의 물과 위의 물

Hebrew 2022. 12. 8. 21:38

창세기 1:6-8

아래의 물과 위의 물

 

 

본문은 둘째 날에 대한 말씀이다. 창조에 대한 본문을 읽어가면 갈수록 많은 논란이나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이 모든 주장은 창세기 1-2장을 창조에 집중하여 창조 자체를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으로 증명하려고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구절부터 일차 독자, 즉 출애굽하여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창조에 쓰인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고 그것을 성경 전체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가를 계속 확인해 왔다. 그런 점에서 본문도 이 구절만 따로 떼어서 독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미 살펴본 앞의 구절들과 연관하여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6절)라고 하였다. 본문을 직역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창공이 그 물의 중심에 존재했으면 좋겠다. 물과 그 물 사이를 구별하면서’라는 말이다. “궁창”이란 히브리어로 ‘라키아’라는 말인데 동사 ‘라카’(두들겨 펴다)에서 파생되어 ‘넓게 펼쳐진 것, 광활한 공간’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전혀 사용하지 않는 단어인데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서 개정성경에서 옛말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굳이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 ‘창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새번역에는 ‘창공’, 쉬운성경에는 ‘둥근 공간’, 현대인의 성경에는 ‘넓은 공간’이라고 번역하였다).

‘라카’는 성막을 지을 때 금이나 놋을 얇게 편다는 말로 쓰였다(출 39:3, 민 16:38-39 등). 언약궤를 만들 때 금을 넓게 펴서 조각목을 덮어 쌌다(출 25:10-11). 넓게 펴서 덮어 싸는 의미로 나타낸 것이다. 하나님은 성막에 창조의 의미를 담아 놓고 그것을 통해 오실 메시아를 보여주고자 하셨다.

“가운데”(히, 타웨크)라는 말은 ‘중앙, 중심’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홍해를 건넌 것을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출 14:29)라고 하였는데 여기 “바다 가운데”라는 말이 ‘타웨크’이다. 물과 물 가운데를 지났다는 것은 물의 중심에 있었고 그것을 통과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세례’라고 하였다(고전 10:2). 세례란 죽음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은 죽음을 통과한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7절에서“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라고 말씀한다. 직역하면 ‘그리고 하나님이 그 창공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 창공 아래로부터 그 물 사이와, 그 창공에서 위로부터 그 물 사이를 구별하시니 그대로 존재했다’라는 말이다.

8절에서 궁창을 하늘이라고 하였으니까 하늘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왜 물을 나누셔서 하늘을 만드셨을까? 하늘을 만드실 때 처음부터 물 한 가운데 하늘을 만드시지 않고 물과 완전히 결별 된 하늘을 만드셨다면 좋지 않았을까? 궁창 위의 물에 대한 논란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나타내시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뜻을 따라 성경을 추적하여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8절)라고 하여 둘째 날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이 빠졌는가에 대해 궁금해 하는데 창세기의 둘째 날은 궁창을 만드심으로 물과 물이 나뉘어 거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다 드러난 상태가 아니고 셋째 날에서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남으로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에스겔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26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27 내가 보니 그 허리 위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내가 보니 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며 28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6-28)

 

 

에스겔 선지자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을 보았다. 보좌의 형상 위의 한 형상이 사람 모양이라고 하였다. 무지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보이시고 그 언약대로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이 이루실 것을 말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궁창 위의 보좌에 앉은 분이 자신의 언약를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날 것을 예언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로 칭하셨으니까 그 하늘로부터 말씀하시는 분이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이렇게 고백하였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요한복음을 이 창조의 상태를 그대로 가져와 복음으로 설명하였다. 1장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이 나왔고 말씀이신 그분이 빛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선언했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죽음을 통해 이루실 언약의 성취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니고데모를 만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3-5)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거듭나다’(헬, 아노덴)라는 말이 바로 ‘위로부터 나다, 하늘로부터 나다’라는 의미이다.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이다. 그것이 “위로부터”(헬, 아노덴)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4장에 사마리아 여자와의 만남에서 생수 이야기를 한다.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0-14)

 

 

사마리아 여자가 먹는다는 야곱의 우물이 아랫 물이다. 마셔도 다시 목마른 물이다. 율법으로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 아랫 물로써는 영원한 해갈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수로 표현하시며 예수님이 주시는 물이 윗 물이라는 뜻이다.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곧 은혜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환언하자면 사마리아 여자는 아랫 물에 속한 자였고 예수님은 윗 물에 속한 자라는 뜻이다. 결국 예수님에 의해 아랫 물과 윗 물이 나누어져 구별된다.

 

 

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6-7)

 

 

궁창을 하늘이라고 하였는데 성경 곳곳에서는 그 하늘을 휘장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 같이 치셨고(사 40:22)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시 104:2)

 

 

이런 점에서 하늘을 찢는다는 것을 휘장이 찢어지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그 휘장이 곧 예수님의 육체라고 성경을 밝힌다.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0-51)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휘장”이라는 헬라어 ‘카타페타스마’란 말은 ‘아래로 퍼지다’라는 ‘카타페타뉘미’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것을 구약의 용어로 표현하면 ‘라키아’이다. 즉 궁창이 찢어져 열린 것이다.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찢으셨다는 뜻이다. 성막에서 앞뜰과 성소,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어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던 것에 길이 열렸고 하늘이 열렸다. 이것을 요한복음의 표현으로는 예수님의 육체를 성전이라고 나타낸다.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9-21)

 

 

그러므로 건물로써의 성막, 성전을 넘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신 진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윗 물을 먹는 자가 생명이 되는 것이다. 아랫 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자가 윗 물을 먹는 자로 살아나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에서 생명이라고 한다. 창공이 찢어져 열리면 위의 물이 내려와 아랫 물을 덮어버린다. 그것을 나타내고 있는 말씀이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이다. 앞에서 이미 봤던 말씀이지만 다시 보자.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린다고 하였는데 하늘이 열리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 예수님을 이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나다나엘을 부르신 후 첫 번째 표적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결국 아래의 물을 통해 위의 물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이 수면의 얼굴을 대하여 일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 물을 아래의 물과 위의 물로 갈라놓고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설명하신 것이었다.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것이 창조 언약 속에 담아 놓은 하나님의 의도이다(2022061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