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37 말씀
제목 : 이름이 거룩히 되게 하소서
본문 :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멘.
우리는 지난 주일에, 수요일 말고 주일에 로마서 8장의 그 말씀을 공부하면서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서 그 하늘의 초월적 존재로 살아야 할 자들이 그 초월과 결별을 하고 이 땅에 그 비 초월 속에서 하늘의 초월적 생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구현해보려고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숭배다, 이렇게 공부했죠? 숭배다. 그것이 무화과나무 잎사귀 치마 만들어 입기요 또 바벨탑 쌓기요 율법지킴이요 성전 섬김이요 희생 제사인 것이라고 그랬죠? 그리고 그 숭배의 근저에는 두려움과 공포라는 그런 무시무시한 감정이 숨어있다는 것도 아울러 공부를 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경고를 하죠?
진리이신 하나님이 그저 과거의 사건 속에서만 인식이 되고 그 하나님은 그 과거의 사건을 근거로 미래에 만나 뵐 어떤 분, 정도로 그렇게 인식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그 진리와 분리된 자, 그 진리의 내용은 하나님이니까 하나님과 분리된 자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럴 때 현재의 나와, 지금 현재의 나와 아무 상관없는 그냥 과거에 나를 위해 죽어주신 어떤 분, 그리고 미래에 가서 만나게 될지 안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가서 만나게 될 어떤 분, 이렇게 그러한 예수, 그런 예수는 절대 나의 구원자, 나의 구세주가 될 수 없다 그랬죠?
구세주가 뭐예요? 메시아죠? 헬라어로 바꾸면 그리스도. 그래서 그 예수, 지금 현재의 나와 상관없는 그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고 제가 말씀을 드린 거라고 제가 수없이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돕니다. 근데 현재의 나와 관계없는 그 과거의 예수, 미래의 그 예수 그거는 그리스도가 아니란 말이에요. 네?
그렇게 나의 미래도 보장해줄 수 없는 그런 존재, 그는 나의 구세주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믿는 그 하나님은 자신의 어떤 행위를 근거로 하여 자신을 지옥에 보낼 수도 있는 두려운 존재가 되는 거죠.
그래서 그 두려움을 갖고 그분을 이제 숭배하고 섬긴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거 안 받는다는 뜻이죠. 두려움을 근거로 하여 하는 그런 숭배, 그런 섬김. 군대 들린 그 군대 귀신들린 돼지 떼 그 에피소드 속에서 그 귀신이, 악한 영이라고 그랬죠? 푸뉴마 다이모니온,악한 말이에요, 비 진리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성경에 나오는 귀신은 하여튼 무조건 진리의 반대편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혼령, 이상한 혼령 그런 거라고 생각하시면 안 되고요.
그 악한 영이 주님께 뭐라고 그러죠?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죠? 그 말은 정확히 Its none of your business 라는 뜻이에요. 너랑 나랑 무슨 상관있는데 왜 나의 삶에 참견하려고 해? 이런 말이거든요. None of your business. 나랑 상관하려고 하지 말고 나를 괴롭히지 마세요. 그래요. ‘발사니조’라는 단언데요, 그 단어가 그게 나중에 계시록에 자주 쓰이는 단언데 지옥에 보내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오늘날 신앙이 대부분 어떤 신앙이냐면 두려움을 근거로 하는 그 신앙은 어떤 신앙이냐 하면,
당신, 나와는 상관하지 마세요. 왜 나의 이 현재의 인생에 자꾸 상관을 해서 나를 자꾸 이렇게 다나토스의 그 죽음의 방향으로 날 끌고 가려고 그래요? 나랑은 상관하지 마세요. Its none of your business. 그냥 나를 지옥에만 보내지 말아주세요, 가 신앙이라니까요. 안 그래요? 그분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인간들이 과거의 그 십자가와도 상관없고 미래의 그 천국과도 지금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그 지옥에는 가기가 싫어요. 그러니까 현재에는 지 마음대로 살고 싶으면서 그 하나님께 요구하는 건 나를 지옥에는 보내지 말아주세요. 발사니조라고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성경이 그걸 마귀의 신앙이라고 얘기하는 거라니까요. 그게 바로 돼지 떼에 들린 귀신의 신앙이야,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엄밀히 말해 예수는요 우리를 위해 죽은 게 아니에요. 우리가 되어 죽으신 거예요. 그게 그거 아닌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단순히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고만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예수는 나라는 주인공을 위해 그 위대한 목숨을 버린 어떤 분이 되는 거예요. 거기에서의 주인공은 역시 나라니까요. 나를 ‘위헤’ 죽었다, 에서의 주인공은 나란 말입니다. 선악과 따 먹은 나, 그게 그 복음의 내러티브 속에서 그 나가 주인공이 되면 안 된단 말에요. 그 주인공을 하나님이 도와주신 격이 되는 게 복음이란 말에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은 나는 예수에게 빚진 자가 돼요.
여러분 나라는 주인공을 위해 그분이 자기의 목숨을 버린 것이 복음이다. 그리고 거기에 반응하는 게 신앙이다, 라고 여러분이 정의하고 있으면 나는 그분께 빚진 자가 된다니까요. 그러면은 반드시 어떤 반응이 나에게서 나오느냐 하면 그 빚을 내가 갚을라고. 그 빚을 내가 갚으려고 하는 행위를 내놓게 되어 있어요. 굉장히 기특한 그런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거를 성경이 무화과나무 잎새라고 이야기했어요. 이파리만 풍성한 무화과나무라고 그랬다니까요. 우리가 여러 차례 확인한 것처럼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나님께 빚을 갚는 게 아닙니다. 은혜라는 단어 자체가 갚음이라는 그 반대급부를 아예 전제하고 있지를 않아요. 갚을 수 있으면 은혜가 아니라니까요. 은혜라는 단어 자체가.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빚을 갚는 데에 초점이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을 갚는 형국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아이테로라는 단어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거라고 그랬죠? 빚을 갚으세요, 빚을 갚으세요, 이렇게. 내가 원하지도 않았을 때 당신이 나에게 주신다고 한 어떤 것이 있다고 나는 들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그거 주세요, 라는 게 아이테오란 말에요. 구하라. 구하는 거란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그 묵시 속에 초월적인 그것을 직접 꽂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 땅의 것들을 사용하여 그 진리, 그 선물을 이 땅의 것을 빌려 우리에게 설명해주죠? 그러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이 땅의 것을 빌려 그 진리로 준단 말이에요. 그게 빚을 갚는다, 라고 얘기 한단 말입니다. 그 은혜, 그 생명은 하나님이 우리를 섬겨주는 거라니까요. 우리에게 빚을 갚는 거예요. 신앙은 절대 하나님께 우리가 빚 갚는 거 아니에요.
생각해보십쇼.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 바실레이아, 우리가 그걸 나라, 통치 이렇게 번역들을 하는데 다스림이란 단어거든요. 그 단어는 섬김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에요. 섬김. 헬라어의 통치라는 단어 자체가 섬김이라는 뜻이라니까요. 바실레이아 나라라는 단어 자체가. 하나님 나라는 섬김의 통치에요. 그건 당연한 거예요. 하나님이 착해서? 하나님은 선한 분이기 때문에? 그리로 너무 서둘러 넘어가지 마세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게. 여러분, 진짜 왕은 섬기는 왕이에요.
세상 왕들은 백성의 섬김으로 비로소 왕의 권력이나 체면을 챙길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죠?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 왕은. 세상 왕은 백성이 섬겨주지 않고 백성이 그의 힘이 되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섬김을 받는 왕은 기실 힘이 없는 왕이라니까요. 자, 인기인들, 요즘 뭐 싸이나 이런 사람들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그 사람을 막 응원하고 박수 쳐주고 환호해주기 때문에 그 사람이 지금 그만큼 된 거죠. 그죠? 그 전에 아무도 박수 쳐주지 않았을 때는 그냥 밤거리의 한량이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어떤 이들이 힘이 되어서 박수와 환호를 해주니까 그 섬김이 힘이 되어 어떤 존재를 하나 만들어내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섬김 받는 왕이에요. 그러나 그들은 그 박수, 그 환호, 그 인기 떨어지면 바로 그냥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거예요. 이게 섬김 받는 세상 왕의 모습이에요.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그런 왕이 되고 싶어 한다니까요. 그런데.
그러나 섬기는 왕은 뭔지 아세요? 진짜 그에게 힘이 있고 진자 가치라는 게 그에게만 있기 때문에 그 왕 밖의 그 어떤 환경이나 어떤 조건도 이 왕의 그 근본을 흔들 수가 없어요. 모든 힘은 여기에서만 나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당연히 이 사람은, 이 분은 밖의 섬김에 아무런 관계없이 그런 거에 구애받지 않고 내 것으로 섬겨줌으로써 왕이 되는 거예요. 그게 진짜 강한 왕이라니까요. 그게 하늘 왕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하늘 왕은 섬기는 왕이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섬기는 왕, 그러면 괜히 약한 것 같고 아니 뭐 그런 왕이 다 있어? 이렇게들 생각한단 말입니다. 하늘 왕의 통치는 섬김이란 말에요.
그렇게 기독교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섬김을 받는 하늘 백성들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찬미가 그 내용이어야 되는 거예요. 그건 성경에 기록돼 있는 거예요, 제가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모든 종교의 신이 하나 같이 섬김을 받는 약하디 약한 우상임에 반해서, 모든 종교의 신이 다 섬김을 받잖아요? 갖다 바쳐야 돼요. 처녀도 바쳐야 되고 아들도 바쳐야 되고 돈도 바쳐야 되고 떡도 바쳐야 되고 다 바쳐야 돼요. 섬겨줘야 돼요, 달래줘야 돼요. 개뿔이나 아무것도 가진 게 없거든요, 그 신은.
오직 우리 하나님만이 당신의 백성을 섬기는 진짜 힘 있는 왕이란 말에요. 성경을 그 관점으로 보여야 된다니까요.
그런 하나님의 그 위대하심 앞에서 그 역동적인 섬김 앞에서 자신의 처음 자리를 인식하게 돼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나는 그 앞에서 없음에 불과한 존재임을 뼛속 깊숙이 자각하게 돼요. 아, 하나님의 그 은혜 그 섬김 없었으면 나는 존재도 아니구나, 라는 이 처음 자리를 그 섬김 앞에서 확인하게 된단 말에요. 성도는. 그게 이 역사 속에서 성도가 하고 갈 유일한 일이에요. 나는 하나님의 섬김을 받지 않으면 존재도 아니구나, 이것. 근데 그것도 깨닫기 전에 이 인간들이 어떻게 된게 그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만 여념이 없어요. 그리고는 이걸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지? 라고 그냥 추측하는 거예요, 막연히.
그러한 물리적 세계의 육적자아의 죽음, 그 죽음이 눈에 보이는 모형으로, 형상으로 나타난 게 십자가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는 이 비 초월 속에 ‘나’로 죽은 거란 말에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비 초월의 세상은 피조물의 가능성과 자존감과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죠? 성경은 그것을 세상, 혹은 율법이라고 명명해요. 호 코스모스, 율법 이거는 그냥 아래에 눈에 보이는 것, 그러나 진리를 담고 있는 것. 그런데 겉으로만 판단되고 인식되면 그걸 그냥 세상, 율법이라고 한단 말에요. 그건 생명이 아니잖아요? 그 안에 들어있는 그 내용이 생명이잖아요. 그러한 피조세계의 그 자기주장과 자기 가능성이 죽어야 진짜 생명인 하늘의 생명이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거잖아요.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거잖아요? 이게 진짜 생명이지,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껍데기가 이건 모형에 불과한 거야, 라고 폭로되어야 되는 거란 말입니다.
어떤 게 진짜 생명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두 개가 놓여있는데 하나가 죽어줘야 나머지 하나가 진짜 생명이라는 게 드러날 거 아니에요? 그러면 호 코스모스 이 껍데기는 죽어야 그 내용이 진짜라는 게 드러날 거 아닙니까? 요게 십자가에서 그대로 드러난 거라니까요. 그 진리는 그걸 둘러싸고 있는 것이 예수라 할지라도 찢어버린다는 것이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은 진리 앞에서 없음으로 부정되어야 하는 운명을 갖고 생겨난 거예요. 그 안에는 우리의 육신도 포함되어 있어요. 예수는 바로 그 세상, 그 아랫것이 되어서 죽는 거예요. 우리의 이 육신이 되어서 죽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그러는 거예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잖아. 그러는 거예요. 그 세상이 호 코스모스라니까요. 내 육신을 포함한 진리의 껍데기들. 그게 예수가 십자가에서 도말해버린 것들이란 말에요. 자기의 육신으로 도말해버린 것들. 그래서 보라! 세상 죄를, 그 세상이 진리로 해석되지 못하면 그게 죄라는 뜻이에요. 그 세상의 죄를 지고, 짊어지고 가는 저 어린 양. 그럼 그가 그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어버리면 진짜 생명만 남겠네요? 그 이야기하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그 예수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되어 죽은 거란 말에요. 그러면 그 죽음은 곧 이 역사 속에서 나의 죽음으로 재현되게 되어 있어요.
그게, 그 과거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되는 거라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그 십자가, 그 예수는 과거의 그냥 십자가, 과거의 예수일 뿐이란 말입니다. 그걸 잘 구별하셔야 된단 말이에요.
자, 그렇게 생명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이고 일방적인 공여인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가 언약의 그 십자가 언약의 기둥이라고 그랬죠? 언약의 기둥에 달리는 모습 속에서 그렇게 중첩하여 보여주시는 거예요. 예수의 그 죽음, 언약의 기둥 위에서의 그의 도륙사건은 우리의 육은 그렇게 죽어야 진짜 참 생명으로 합일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그것은 그 하나님의 희생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방적 공여이며 선물이야,를 중첩하여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가 거기서 죽는 거예요. ‘내가 되어, 나를 위해’ 예수 안에서 함께 죽는다는 건 현재의 나는 그 죽음과 아무상관 없는 것이다, 라는 의미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 죽음은 오늘 날 나의 죽음의 예표였구나! 가 예수 안에서 내가 죽었다, 라는 것의 의미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안에서 나는 옛날에 죽었으니까 나는 인제 여기서 그냥 내 맘대로 살아도 돼! 가 아니라니까요.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바로 그 이야기를 담고 있는 거예요.
이 물리적 세상의 무화과나무 치마 만들기 작업은 그 자체로 생명일 수 없다는 것을, 그 자체로 너희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는 옷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구구절절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에요, 성경 전체가 그 내용이란 말에요. 진짜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있는 그 진리 안에 들어있는 그 하나님이다, 라는 것을 알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도 그러는 거예요.
네 생명은 나지! 네 기업은 나지! 네 상은 나지! 그런다니까요, 하나님이요. 그 하나님을 우리가 갖고 있는 글로 써 준 게 말씀이고 그것이 진리라니까요. 우리가 갖고 있는 소리로 들려주는 것이. 그러니까 ‘그 하나님’ 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그것이, 진리가 나의 생명이다.내가 길이고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이 그거예요. 그것이 생명이지. 그 하나님이 생명이지. 그 영이 생명이지. 너희 육은 진짜 생명 아니란다. 이렇게 이야기해주는 거란 말입니다. 그것을 예수가 몸으로 삶으로 보여주고 가셨으므로 예수님이 그러는 거죠.그 성경이 나에 대해 기록한 거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성경이 나에 대해 기록한 거야. 그래서 성경이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거예요. 그 성경이, 그 말씀이 예수를 기록한 거니까.
그럼 예수 안에서 그 세상 속 자기부정의 삶을 그대로 살아야 하는 우리 삶도 역시 성경에 기록돼 있어야 되죠? 말씀에 기록돼 있어야 되죠?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을 말씀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의 이름은 뭐예요? 또? 우리의 이름도 말씀이에요.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 우리의 이름을 말씀이라고 한다니까요.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그려지는 인생, 이거를 말씀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요한이 자신의 그 묵시록에서, 요한계시록에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는 저주 받은 자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생명책은 뭐예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성경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이 책이 생명이다, 그런단 말에요. 그래서 그걸 생명책이라고 해요, 성경을. 그러니까 성경은, 말씀은 그냥 생명이에요. 생명을 그려주는 거예요. 거기에 내가 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으면 내가 생명책에 녹명된 자가 되는 거예요. 그 생명책은 뭐 천국 앞에서 베드로가 들고 있는 치부책이 아니라니까요. 성경책이에요. 그게 내 이야기면 내가 생명, 그 생명책에 기록돼 있는 자가 되는 거란 말에요. 근데 그게 내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예수가 행한 어떤 일이 되어버리면 그건 내 책이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되면 나는 그 예수에게 빚을 갚기 위해 그 책을 내 행위로 행해버리게 된단 말에요. 세목 하나, 하나를.
그러면 그게 나중에 심판의 책이 돼요. 하나님의 다른 손에 들려있는 책들이 된단 말에요. 심판의 책.
자, 그렇게 언약의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이야기가 기록돼 있는 그 성경이 나의 이야기로 경험되지 않는 자들은 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돼 있지 않은 자들이고 그들은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그런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승승장구 일취월장할 때에는 그런 예수의 그 십자가의 죽음, 나의 부정, 자기부인이라는 것이 좀체로 나에게 이렇게 깨달아지거나 인식되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를 잘 믿으면 그 예수 믿은 대가로 우리의 인생이 확 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렇게 지지부진 지리멸렬 이 쪽으로 가게 돼요. 그렇다고 뭐 쫄딱 망하고 이런 말이 아니에요.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근데 그게 맞다, 는 거예요. 왜 예수를 믿었는데 내 삶이 이 모양이야? 라고 말씀하시면 안 돼요. 왜? 그게 진짜 하나님이 이끄심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제가 조금 더 설명을 해드릴게요 오늘 우리가 공부할 부분이 이름이 거룩히 되게 하옵소서라는 부분이니까.
자, 그 이름이라는, ‘오노마’ 라는 단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돼 있다, 라는 거기에서 나오는 이름이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이름과 똑같은 단어에요. 이름, 이름. 제가 전에도 잠깐 언급을 한 기억이 있는데 성경에서 이름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어떤 존재를 다른 존재와 이렇게 구별하기 위해 붙이는 그런 호칭 정도가 아니에요.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특히 고대시대 때의 이름의 의미는. 그래서 이름을 다 그렇게 좋은 걸로 지은 거예요. 오늘 날도 이제 그런 거 때문에 이름에 대해서 그렇게 애착들이 많이 있는데 저희,미국에서 애들 학교에 가갖고 대이빗 그러면 한 삼분의 일이 다 돌아봐요. 다윗, 다 좋으니까. 요셉, 존. 골리앗은 없어요. 사울도 없어. 좋은 이름을 갖고 싶어서. 근데 고대시대 때는 정말 그 이름이 그 존재의 내용과 본질을 이렇게 축약하여 담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각 짐승들의 이름을 붙였다는 건 그냥 대충 아무렇게나 붙였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 존재의 본질과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이에요. 그게 이름 붙이다, 그 내용을 알다, 이런 말이란 말에요. 그래서 그 이름은 내용으로 분석되어져 이해되어져야 되는 거지 그냥 들리는 소리로만 이해되어지면 안 돼요.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그 이름들도 사실은 고유명사로 그냥 넘길 게 아니라 일반명사로 다 이렇게 해석해줘야 되는 거예요. 어떤 곳에서는 뭐 어떤 사람, 혹자 이렇게 하는데 어떤 곳에서는 이름을 쓸 때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성령이 편집을 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예수에 대해 요약되어 기록이 돼 있는 성경말씀은 하나님에 대해 기록돼 있는 거, 예수님이 그거 나에 대해서 기록된 거야,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에 대한 그 내용을 축약하면 뭐라 그랬어요? 오노마, 이름이라 그랬죠? 그럼 성경말씀은 뭐예요? 하나님의 이름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갖고 있는 국어사전의 이름, 말씀 이런 개념들을 갖고 있으면 절대 이해가 안 갑니다. 성경은 그런 국어사전의 개념정의에서 벗어나서 읽으셔야 되는 거예요. 그걸 이름이라 그래요. 이름. 철수 영희 순희 이런 것에서 지금 벗어나시란 말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거죠? 하나님에 대해서 기록한 거라면서요?
그것은 또한 예수 안에서 그 예수와 연합된 삶을 살아야 하는 내 이야기니까, 그 말씀이. 내 이름이기도 하네요? 그죠? 그러면 대충 눈치가 빠르신 분들은 이제 눈치를 채셨을 텐데 이름이 거룩하다, 하기야죠, 이거는 깨끗하게 하다, 이런 뜻이에요. 거룩이라는 단어는 한문도 아니고 그냥 한글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한글 2000이나 뭐 그런 프로그램에서 거룩, 이런 말을 치면 빨간 줄로 이렇게 쭉 쳐집니다. 그거 맞춤법 틀렸어. 이렇게 나와요. 그거 한글인데 그 거룩이란 말, 하기스라는 기저귀이름 알죠? 그게 헬라어 에요.
깨끗한 것, 이런 뜻이거든요. 하기야조, 거룩하게 하다가 하기아조거든요.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다. 그 말씀이 깨끗한 말씀이 되게 하세요, 이런 말이 뭐겠어요?
그 비 진리가 아닌, 비 진리는 당연히 율법이죠. 도덕적 의식, 윤리 이런 걸로 해석되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진짜 그 진리의 말씀 그것으로 이해되어진 깨끗한 말 이게 이름이 깨끗해지는 거란 말에요.
히브리어로 그 이름이라는 단어가 쉠 이라는 단언데요, 멤미는 쉼하고 멤이니까 분석된 말씀, 분석된 말씀 이런 뜻이에요. 그 쉠이라는 단어는 관계부사로 사용하면 거기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여기가 아닌 거기, 이런 뜻이에요. 여기는 당연히 땅이겠죠? 우리에게서, 우리의 관점에서, 그죠? 여기는 땅이고 거기라는 뜻이에요. 관계부사로 쓰면. 쉠이, 이름이. 거기에다가 히브리어 그 ‘마임’ 그 마임이라는 글자 있죠? 고 단어 고 복수가 ‘임’ 으로 그렇게 붙어버리면 고게 솨마임이 대요. 하늘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늘들이 되는 거예요,그러면은. 그 이름에다가, 이름에다가 진리, 말씀, 물이란 뜻의 그 마임이라는 단어가 복수로 붙어버리면 그게 하늘들이 된단 말에요.
그러면? 그 단어를 이렇게 풀어보면 어떻게 되겠어요?
쉠이 거기이고 임이 말씀, 진리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진리가 있네!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리 그 말씀, 그건 하나님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거잖아요? 진리는, 그죠? 그 물이라는 건. 하나님이 있는 거기. 그걸 솨마임이라 그래요. 하늘이라고 그런단 말에요. 그러면, 보세요. 그 진리, 그 하나님이 지금 어디에 계세요? 내 안에. 그럼 그 진리가 있는 그 물이 있는 거기가 뭐라고요? 솨마임, 하늘이죠? 그러면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 나를 아들로 낳게 하는 그 아버지, 그 진리가 나를 낳게 하는 거니까.
그러면 내 안에 그 진리가 들어있으면, 솨마임 이 하늘들 안에 그 진리가 마음으로 갖고 있게 되면 그게 바로 하늘들 안에 아버지의 상태죠? 그것이. 그렇게 되면 그 진리가 내 안에 진짜 율법이 아닌 진리고 내 마음으로 딱 자리를 잡았네요? 깨끗한 말로. 그러면 그 말씀 그 진리, 그 이름이 깨끗해졌네요. 그러니까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와 이름이 거룩히 되었다, 라는 말은 같은 말이에요.
하나님이 이루시는 거라니까요. 이미 우리 안에 이루어진 우리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뭔데 하나님의 이름을 깨끗하게 하세요, 라고 이렇게 청유를 합니까? 그건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당신의 언약 안에서.
제가 예전에 부정과거 명령형이라는 그 시제는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아우르는 시제라고 그랬잖아요? 주기도문에 나오는 그 동사들이 다 과거시제에요. 근데 명령형으로 쓰인단 말에요. 그러면 그거는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고 미래에도 되어질 것이고 과거에도 된 것, 이런 뜻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된 것은? 그 이름이 그 말씀이 거룩하게 된 것은? 이미 이루어졌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질 것들이에요, 다. 그게 우리가 할 거는 아니란 말에요, 사실은.
자, 그렇게 그 진리의 마음을, 그 하나님을 내 마음에 품고 그 하나님과 연합의 상태가 되어버리면 내 밖의 하나님께 두려움과 불안을 근거로 한 엉뚱한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거란 말에요. 그 하나님이 내 밖에 계셔버리면 우리는 항상 그분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혹시 안 들어주면 어떡하지? 이런 두려움의 대상으로 놓게 되고 엉뚱한 기도를 하게 된단 말에요. 거룩한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어요. 그 거룩이라는 단어가 깨끗함이니까. 근데 그거는 묵시의 언어란 말에요. 하늘의 언어라니까요. 이 땅,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 있는 것 중에 깨끗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그랬다니까요. 모두가 죄인이라고 그랬단 말에요. 그럼 다 부정한 것들이란 말에요, 이거는요.
근데 그것들이 하늘의 초월을 만나게 되면 그것이 깨끗하게 된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는 거예요. 그가 거룩하다, 라고 이야기하니까요.
따라서 진리이신 하나님을 내 밖에 두고, 과거에 두고 미래에 두고 자신의 원하는 바를 열심히 아뢰는 행위는 진정한 의미의 기도가, 프루슈코마이가 될 수 없는 거란 말에요. 그래서 ‘기도’의 서두에 하늘들 안의 그 아버지, 그 이름은 거룩하게 된 거야. 그 때 청유, 기도가 나올 수 있다는 얘기에요.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 고넬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해라, 그래놓고는 부정한 것들을 막 하늘에서 그냥 보자기에다 담아서 주세요. 먹어라! 그래요. 그거 무슨 심통이에요? 부정한 걸 그냥 막. 먹으라, 그래놓고는 베드로가 어떻게 하나 보세요. 베드로가 안 먹죠. 아직도 그 율법주의에서, 그 율법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거예요. 사도로 일을 하고 있는데도.
제가 어떻게 부정한 걸 먹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저 부정한 로마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합니까? 라고 이야기한다니까요. 그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깨끗하다고 한 건, 이 아래의 것으로 그렇게 부정해보여도 그건 깨끗한 거야.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그런 거를, 이런 나타난 모습, 외양, 외모를 가지고 부정하다 깨끗하다 할 수 없는 거예요, 여러분. 아니, 그렇잖아요? 굽이 갈라지지 않은 거, 이건 부정하다, 먹지 마! 그랬단 말에요. 부정하다는 건 죄라는 뜻이거든요. 그거에 닿게 되면 죄란 뜻인데 자, 그 죄가 우리가 여태까지 배워온 것처럼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 그 어떤 것을 가리키는 거라면 그게 굽이 있는 거와 굽이 없는 거와 무슨 상관이 있어요? 굽이 있는 거와 없는 게 도덕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그런데 하나님은 부정하다, 그랬다니까요. 그거 죄야 그랬다니까요.그럼 적어도 죄라는 건, 성경이 말하는 죄라는 건 그런 거는 아닐 거 아니에요? 네? 아니, 구약에서는 애를 낳아도 부정하다고 그랬다고요. 그럼 도대체 부정하지 않은 게 뭐냐고? 심지어 월경을 하는 여자가 앉았던 자리에 앉으면 너도 부정하다, 그랬어요. 진짜 여러분,그게 전염이 됩니까? 무슨 그건 도대체 어디서 나온 이야기냐고요? 그게 무슨 전염이 된다고? 하나님은 근데 마치 그게 전염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니까요. 근데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모든 걸 다 그냥 우리의 그 이성의 수준에서 자꾸 도덕과 윤리로만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니까 뭐 깨끗한 교회 깨끗한 사람, 훌륭한 사람 못난 사람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자, 그 이름의 거룩 그것에 대해서 제가 조금만 더 부연설명 해드릴 게요. 제가 조금 전에 그렇게 하늘이 된 성도들 안에 그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하나님의 아들을 낳는 아버지가 되려면 그 말씀은 반드시 하늘의 그 은밀한 것, 그 진리로 올바로 깨달아진 말씀이어야 한다, 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이름이라고 한다, 그랬어요. 이름. 그게 하나님이니까, 진짜, 우리를 낳게 하는 하나님이니까. 창조하는 하나님이니까. 그게 이름이란 말에요, 하나님의 이름. 그래서 말씀이 이름이다, 라고 했죠?
그러니까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 나를 낳게 하는 그 아버지가 이름이잖아요. 그죠? 그게 이름이란 말에요. 하나님의 이름. 그리고 그렇게 이 세상의 것과 구별이 되어서 하늘의 은밀한 것으로 그 참된 것으로 존재하는 걸, 그걸 거룩이라고 그래요. 구약성경에서는 그 거룩의 개념을 성으로 두르다, 울타리로 두르다 이렇게 표현을 해요. 그래서 예루살렘 성 있죠? 그 성전을 성으로 이렇게 쌓아서 두르라고 그런 거예요. 그리고 어떻게 모형을 하셨느냐 하면 그 밖에는 이방, 그 안이 하나님의 백성, 이렇게 가르치셨단 말에요. 그러니까 울타리를 두르다 그래서 안과 밖을 구별해서 밖은 이방, 안이 하나님의 백성. 이렇게 설명을 하신단 말에요. 그렇게 구별된 걸 깨끗하다, 성결하다, 라고 이야기한단 말에요. 그래서 성전 안에 모든 기명들 있죠? 그릇들이나 뭐 이런 것들, 상. 거기에는 전부 이렇게 성체를 만들 으라고 해요. 성체가 이렇게 성, 이렇게 된 거 있죠? 요철처럼. 왜냐면은 그건 거룩하다는 의미였단 말에요. 그래서 그릇도 이렇게 성체를 만들 으라고.
그래서 에덴동산이, 동산이라는 단어 자체가, 간이란 단어 자체가 울타리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으로 함께 거하던 곳이라는 의미에요. 깊음의 울타리, 이런 말이에요. 울타리. 하나님의 구별된 성전을 상징하는 거였죠. 그 에덴은. 하나님과 한 울타리 안에서 그분의 생명력으로만 존재하는 피조물의 상태, 그걸 거룩이라고 해요. 그래서 그들이 벌거벗은 상태에서 하나님이라는 옷으로 전혀 부끄러움이 없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그런 말을 일부러 기록해놓은 거예요.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더라. ‘벗었으나’ 이렇게.
따라서 피조물의 거룩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연합이 전제되지 않고는 절대로 성립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그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거나 우리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와 연합한 그 진리의 말씀이 사랑이신 하나님을 올바로 설명하는 것이면 돼요. 아, 사랑이구나! 그 은혜구나! 이렇게. 그러면 그 이름이 거룩해지는 거예요. 내 안의 그 말씀이 깨끗한 말씀이 되는 거예요.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이 이 세상의 도덕이나 윤리나 사회규범 등의 것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그런 거는 당연히 잘 지켜야 되는 거예요. 이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살아야 되니까. 안 그러면 경찰이 잡아간다니까요.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서 잘 지키세요. 그리고 사람답게 살아야죠.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근데 그거는 신앙의 목적지가 아니라니까요. 근데 인간들이 워낙 개판으로 사니까 그거 조금 잘 하면 좋은 교회, 깨끗한 교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생각해보십쇼.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의 윤리나 도덕이나 사회규범이나 착한 사람 되기의 매뉴얼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그 매뉴얼은 법으로 항상 내 밖에 존재하는 거라니까요. 그런 것으로는 우리가 아버지를 담은 하늘들이 될 수 없어요. 그 법은 나를 아들로 낳을 수 없어요. 나를 종으로 만들어요. 무거운 짐을 지운 종. 근데 우린 배웠잖아요. 우린 종의 영을 받은 게 아니라면서요? 아들 만드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면서요? 그럼 절대 그 말씀이 그렇게 보이면 안 되는 거란 말입니다.
계 19: 11,13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충신은 믿음이라 그랬어요. 피스토스, 믿음이고 진실은 진리에요. 근데 어디가 열려요? 하늘이 열렸더니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데 그게 믿음이고 진리라네요. 그거 내 안에 있는 것들 아닙니까? 그 하늘이 열렸더니 그게 들어있어요. 근데 그것이]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친다, 책망한다, 그랬습니다, 심판하며 싸우더라]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내 안에 계신 그 진리, 그 믿음이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내 안에 들어있는 그것이. 근데 그것은 또 하나님이거든요. 그러니까 말씀이에요. 이름이에요. 믿음이에요. 진리에요, 그리스도에요. 다 같은 말이에요. 그리고 그걸 품은 내가 솨마임, 그것이 있는 거기, 진리가 있는 거기, 하늘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내 안에 그분의 섬김 그분의 말씀이 들어있으면 내가 하나님 나라인 거예요. 그래서 천국은 거기 있잖아, 그러는 거예요. 천국 거기 있잖아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마. 거기 있어. 근데 그건 여러분의 감정으로 막 느끼거나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잖아요? 천국은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물론 굉장히 좋을 거예요. 굉장히 행복할 거고, 편안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에피뚜미아가 그려놓고 상정해놓은 그런 곳은 아니에요. 그런 퇴페적인 곳. 인간들이 원하는 거 다 그냥 구비되어 있는 그런 퇴폐적인 곳이 천국 아니란 말입니다. 꿈 깨세요.
자,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진리로, 믿음으로, 충신이요 진실이다, 그랬죠? 진리로 믿음으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밖에서 어떤 일을 행한 분으로 인식하고 있으면 그들은 절대 거룩한 이름을 가진 자가 아니다, 이런 말이에요. 이것이.
우리 안에 그 믿음과 진리라는 그 이름, 그것이 우리 이마에도 새겨진다는 거 아세요? 그럼 그건 우리의 이름이기도 하네요. 또? 보세요.
계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기둥은 언약입니다]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성도 위에] 기록하리라
계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 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이마라는 것은 그 사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위치거든요. 그럼 거기에 이름이 쓰여져 있다, 라는 것은 그게 그것이다, 이런 뜻이에요. 어린 양의 이름, 아버지의 이름. 그 아버지는 진리라면서요? 그 어린 양은 진리를 안에 품고 오신 그 분이고. 그 이름이 내 이마에 쓰여 있으면 우리도 역시 그 삶을 그대로 사는 거예요. 그 진리를.
계 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 아내, 우리죠? 교회죠?]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거룩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행실이라는 단어가 디카이오마, 의에요. 그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의다, 그거예요, 의. 의를 입고 있으면, 옳은 이라는 단어는 이제 진리라는 말이고. 그게 참된 진리의 의야. 이런 말이에요. 진리, 의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이들은, 이라는 뜻이에요, 원문에 보면 이들은] 하나님의 참되신 [알레떼이아, 진리] 말씀이라 하기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온 그 하나님의 아내들이, 어린 양의 아내들이 이름이 진리, 말씀이래요. 진리래요. 말씀이래요. 그들의 이름이. 그리고 그들이 뭘 입고 있다고 그래요? 진리의 의를 입고 있다고 그래요. 의를 입고 있다. 의를 입고 있다고. 그 아내가 거기에 보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보세요. 8절 보면 그에게 허락하사, 에요. 그 옷은 그에게 입혀주셨다는 거예요, 신랑이. 그 신부가 거기에다가 바늘 한 땀도 보탤 수 없다니까요.
롬 3:19-22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이 의에요, 계시록의 그 의라는 옷이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과 선지자, 모든 성경은 다 그 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거죠]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 옷을 입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옷. 그거 입으면 신부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주 기특하게 자신의 열심과 노력으로 의의 옷을 입으려 하는 아담 적 시도들을요 전부 육신의 일로 묶어버려요. 육신의 일은 저주받는 거죠? 그리스도라는 옷과 율법의 옷을 완전하고 분명하게 나누어줍니다.
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옷 입어라, 아니면 정욕으로 육신의 일을 도모한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정욕을 위하여 육신, 에피뚜미아로 육신의 일을 도모하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거예요. 이 극명한 대조란 말에요.
갈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 죽고 영으로 산자.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산 게 세례니까. 그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거야. 이런 말이에요. 그 안에 말씀이 있는 거니까요. 그죠?
자, 그렇다면 이렇게 육신의 일로 해 입은 무화과나무 잎사귀 옷을 몰수당하고 거룩한 의의 옷을 입기 위해서는 우리의 그 아담 적 행위, 즉 육이 삭제당해야 맞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밖에서 두드리시는 거라 그랬죠? 죽이기 위해 두드리는 거예요. 그거요. 그러면은 열려요 내가. 열리게 되면 그 하나님이 나의 육을 뚫고, 휘장을 찢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휘장이 찢어지는 건 예수님의 죽음이었잖아요? 육신의 죽음. 나의 죽음인 거예요. 문을 열고 찢고 들어오셔서 그 분이 씨로 내 안에 심겨지는 거. 나를 장악해버리는 거. 그리고는 당신의 그 하늘 양식으로 먹이시는 거예요. 주기도문은 전부 그 얘기에요. 일용할 양식은 그 이야기이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그 이야기이고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고, 그 이야기이고, 다 똑같은 이야기에요.
원래 이름이라는 단어 오노마는 히브리어 쉠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옮겨놓은 거라고 그랬어요. 그 쉠이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에 나오는 게 셈, 함, 야벳 있죠? 노아의 세 아들. 그 아들 중에 셈이라는 이름이 쉠이에요. 우리말로 그냥 셈이라고 번역해 놨지만. 셈의 이름은 셈이에요. 그 사람의 이름은 이름이에요. 근데 창세기를 보면 그 셈이라는 사람, 그 이름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어떤 한 무리의 아비가 된다고 이야기해요. 아비라는 건 그들의 대표라는 뜻이거든요. 그걸 우리 한글 개역성경은 조상이라고 그렇게 번역해 놨는데 아브, 아버지란 말에요. 아버지란 단어에요.
창 10:21
셈은 [자, 이름은, 이름 이라는 것, 말씀이라는 건] 에벨 온 자손의 [이 자손이 벤허의 벤이 아들이라고 했죠? 벤의 복수에요 아들들의 아버지이고]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여기서 그 에벨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아바르에서 온 건데 이게 건너가다, 란 뜻이에요. 그 단어가 히브리에요. 그래서 히브리인 그러면 건너간 자들이에요. 어디에서 어디로? 요단 동편에서 서편으로. 건너간 자.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건너간 자. 이런 뜻이에요. 그 이름은, 말씀이라는 건, 그 쉠이라는 건 건너간 자들의 아비다, 그랬어요. 그러면 말씀 이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건너간 자들은 아비의 이름이 쉠이잖아요? 말씀이란 말에요. 이름이란 말에요. 그러면? 그들의 이름은 다 뭐다? 말씀이란 말에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그들의 이름을 말씀이라고 하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우리 국어사전에 나오는 그 정의들이나 개념은 다 내려놓으시란 말에요. 말씀이 뭐야? 이름이 말씀이 뭐야? 그래서 제가 설명해드렸잖아요? 충분히. 그죠? 그러니까 건너간 자, 히브리의 아비, 에벨, 아바르의 아비라고 했어요. 이름이. 그러면 건너간 모든 자.이로부터 시작해서 여기에서 이제 건너가는 모든 자들, 이들은 다 이름이야! 그러는 거예요. 다 말씀이야! 그러는 거예요. 그의 아비가 이거라니까. 믿음의 조상, 같은 말이에요 이게. 그래서 계시록에서 우리 이름을 말씀이다,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건너가게 됐죠?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그들이? 어린 양의 유월절 희생으로 건너가죠? 근데 그 패싸흐, 유월절이라는 단어, 그 단어도 Passover, 건너가다, 라는 단어에요. 아바르하고 같은 단어라고요 그게. 근데 그 파싸흐라는 단어에서 패사흐가 온 건데 패사흐가 뭐냐면 절뚝거리다, 란 뜻이에요.
그러면 보세요, 재밌죠? 졀뚝거리면 건너간다, 이런 뜻이거든요. 어디서 봤어요? 이걸? 얍복 강. 얍복이 요단 동편이란 뜻입니다. 그럼 이놈은 건너가야 돼요 반드시. 서쪽으로. 그래야 가나안이니까. 동편은 광야란 말에요. 그리고 야보크라는 그 단어 자체가 광야, 사막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반드시 건너가야 돼요. 그래야 야곱은 이스라엘로 살아요. 승리자로 사는 거예요. 야곱은 강도니까. 강도라는 건 하나님의 말을 잘못 쓰는 자를 강도요 절도요 그런단 말에요. 야곱이란 이름 단어 자체가 강도에요. 실족시키는 자, 발목을 잡는 자.말을 잘못 전해줘서 발목 잡아 넘어트리는 자란 뜻이라고요. 그러니까 비진리가 진리로 넘어가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이는 건너가야 되는데 건너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야 돼요? 절름발이가 돼요. 절름발이가 된다는 건 뭐냐면,
라메드가, 히브리어 라메드가 지팡이라는 단언데 이 지팡이가 가르치다, 란 뜻이에요. 인도하다, 가르치다. 하나님의 그 가르침을 의지하지 않고는 그 하나님을 지팡이로 의지하지 않고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자. 원래 환도 뼈라는 단어 자체가 남자의 씨를 담은 그릇이라는 뜻이란 말에요. 그 단어 자체가. 그런데 씨가 살고 그릇이 깨지는 거예요. 환도 뼈가 깨지면 그 씨, 그 생명, 그 생명이 그의 것이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게 절름발이가 되어, 환도 뼈가 진짜 깨지면요 절어도 굉장히 심하게 절게 된다고요. 그래서 지팡이 없으면 못 걸어 다니게. 하나님이라는 그 지팡이 진리의 말씀을 지팡이로 삼아 비로소 온전하게 되는 자. 그들이 건너가는 자들이란 말에요. 그래서 절름발이, 다리를 절다, 건너가다. 이걸 히브리사람들이 같이 써요.
제가 어제 애굽문자를 이렇게 공부를 해봤는데 애굽문자 거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애굽문자로 처음에 말씀을 주셨을 거 아니에요? 모세가 아는 글자는 그거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사십 일간 그 문자를 가르쳤단 말에요. 그리고 그것이 이제 히브리문자로, 거의 비슷해요. 히브리문자로 변해서 성경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 애굽문자에 담겨 있는 그 의미와 내용을 갖고 하나님이 사용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줬단 말에요. 그런데 그 애굽문자를 연구해보니까 성경 안의 내용이 그 안에 다 들어가 있어요. 근데 사람들은, 애굽 사람들은 그걸 그렇게 못 본 거예요. 근데 하나님은 그걸 사용하여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더라니까요. 보니까. 그러니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어요. 세상에 그들의 그 문자 안에, 그 그림 문자 안에 상형문자 안에 뱀 이야기도 들어가 있고 울타리 얘기도 들어가 있고 죄 이야기도 들어가 있고 하나님의 낚싯대 이야기도 들어가 있고 배 이야기도 들어가 있고, 다 들어가 있어요. 하나님이 니들이 아는 건 그거잖아? 거기서 430년 살았으니까. 그걸로 니 수준에 맞게 내 진리를 줄 게, 하고 준 거예요.
그러니까 보세요. 그렇게 그들이 어린 양의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들을 건너가 버리자 그들이 비로소 그 어린 양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이 건너간 자가 되는 거예요. 건너가는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건너간 자들을 ‘이름’ 이라 그래요. 말씀이라 그런다니까요. 그들이 당연히 그 진리로 깨끗해져야죠. 우리가 이제 주일에 공부할 부분인데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한다, 그러잖아요. 왜? 아니, 그들이 나타나야 내가 왜 존재하고 있는지, 내 진짜 이 존재의 목적이 뭔지 그들은 말해줄 수 있단 말에요. 근데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으니까 피조물들이 그냥 그 자리에서 멍하니, 왜 내가 담고 있는 이 진리를 말해주는 이가 왜 하나도 없어? 기다리는 거예요. 그게 피조물들의 탄식으로. 성도들에겐 보이더라는 거죠. 다 진리인데, 이게 다 복음인데, 이게 다 성경말씀인데 왜 사람들은 거기에 그냥 묶여서 살까? 이렇게. 그게 탄식이지 뭐예요?
그렇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옷 입어서 거룩하게 된 거예요. 따라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게 하라, 라는 청유는 이미 완료가 된 현실이란 말입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구약 때부터 우리에게 약속하신 새 언약의 성취이기도 해요. 이름이 거룩하게 되라. 깨끗하게 되라. 더럽혀진 것이 깨끗하게 되라, 이거.
겔 36: 22-23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이 열국 가운데서 더럽혀졌다, 라고 말씀하세요. 니들이 착하게 안사는 바람에 니들이 믿는 하나님인 내가 쪽팔려 죽겠다, 이런 말이 아니에요. 나의 이름을 좀 더럽히지 마. 이런 말이 아니라. 이름은 곧 말씀이고 하나님 자신이라 그랬어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하나님의 백성이네요. 그들이 그 진리대로 살지 못하고 왕이 되고 싶은 인간,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고 싶은 인간, 율법주의와 인본주의로 살게 되면 그가 그 이름을 더럽힌 자라는 거예요. 깨끗한 말 아니잖아? 그 진리 아니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모든 것이 하늘, ‘거기’ 가 아닌 땅, 여기에서 출발하는 거죠. 더럽혀진 상태에서 출발을 해서 어떻게 그것은 깨끗해질 수 있는가를 이제 설명하는 거잖아요? 하나님을, 복음이라는 것이. 그래서 우리가 일단 ‘여기’로 오는 거예요. ‘거기’가 아니라. 여기로 와서 율법,인본주의로, 아담으로 출발하잖아요? 그게 이미 더럽혀진 이름이라니까요. 더럽혀진 하나님의 말씀들이라니까요, 그것이.
거기에서 출발한단 말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그 이름을 위해서 그들을 깨끗이 하겠다, 그래요. 이걸 내가 어떻게 깨끗이 하는가 한번 보라는 거예요. 이 더러운 걸. 이 율법주의와 인본주의 여기에서 어떻게 내가 이것들을 진리로 만들어내는지 보라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언약이란 말입니다.
엡 1:3-7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자, 우리를 하나님의 이름인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이 더러운 것에서 우리를 더러움 속에서 출발시켜 이걸 어떻게 깨끗이 하는지를 보여주시려고 우리를 예정했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지 하나님도 우리를 그냥 어쩔 줄 몰라서 너무 이뻐서 어쩔줄을 몰라서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버려주시는 그런 신파가 아니란 말에요, 복음은요. 하나님의 그 영광,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택함 받은 거, 예정 받은 게 우리라니까요.]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의 행위로 말미암아가 아니에요]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전부 안에서에요,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거저란 말에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고, 이게 목적이라니까요]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게 곧 깨끗함, 거룩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피. 그리스도의 영. 그 말씀에 의해 우리가 깨끗해지는 거. 너희들의 육의 열심이나 노력, 그런 것이 아닌 그 말씀, 하나님의 그 능력에 의해 깨끗함을 받게 되는 거, 그거 보여주려고 너희를 예정한 거 아냐?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창세전에 택함 받고 그 뜻하심의 예정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은 그 거룩한 하늘로부터 비 초월의 땅으로 내려와서 마치 택함을 받은 자들이 자기들의 땅에서 이렇게 쫓겨난 모습으로, 그런 모습이잖아요, 여기? 여기 우리 땅 아니죠?아, 집으로 가자! 어디로 가자는 거예요? 우리 진짜 집. 그러니까 일단 여러분이 이 땅위에 아담으로 온다는 건 그 땅에서 쫓겨난 자의 모습으로 오는 거잖아요? 그게 더럽혀진 거예요. 그게 에스겔서 36장의 이야기라니까요.
그거를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을 바벨론이나 앗수르나 여기저기에 포로로 보내는 것으로 또 보여준 거지 그 이스라엘만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라고 그렇게 그런 것들을 역사 속에 그려준 게 아니란 말에요. 우리 이야기란 말에요. 그것이.
우리가 하늘에서 그렇게 내려왔다니까요. 뭐하러?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도구로. 그래서 더럽혀진 이름으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어떻게 우리가 깨끗해지는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 피로.
에스겔서는 그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진 이유를 이렇게 밝혀요.
겔 36:17-21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 고토에 거할 때에 그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보세요. 이스라엘이 왜 더럽혀졌느냐 하면 그들의 행위로 더럽혀졌다, 그래요 그러면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나 보기에 그 소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은, 성경은 생명을 피라고 그러죠? 그런데 피를 땅에다 쏟는다, 라는 의미에서 그걸 부정하다고 설명한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더럽혀진 그들의 그 행위가 뭐라는 거예요? 진짜 생명을 땅에다가 쏟아버리는 행위. 진짜 생명인 그 말씀을 땅 적 차원으로 이해를 해버리고 그걸 땅의 것으로 행해버리면 그걸 땅에다가 쏟아버리는 거예요. 그게 월경 중에 있는 부정한 여자라는 거예요. 그 행위로 너희가 더러워졌다, 라고 이야기해요]
18 그들이 땅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더럽혔으므로 [그 생명의 말씀을 땅에다가 쏟으면 안 된다니까요] 내가 분노를 그들의 위에 쏟아
19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이거 요한계시록에 계속 등장하는 말이죠? 그러면 내가 그들의 그 행위를 심판해버리겠다는 거예요.] 각국에 흩으며 열방에 헤쳤더니
20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그들이 그 행위를 가지고 그대로 열국에 퍼져서 행해버리면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가 된다, 라는 거예요]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백성이 여호와의 땅에서 떠나면 바로 그렇게 피를 땅에 쏟는 행위를 하게 되는 거예요.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세 가지로 나와요. 물론 그건 하나님의 이름은 아니에요.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몰라요.
제일 먼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엘로힘이라는 이름이 있고, 창세기 2장 4절부터는 여호와 엘로힘이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선지서에는 여호와라고도 나와요. 세 가지 이름이에요. 엘로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하나님, 그 내용인 그 하나님을 이야기해요. 여호와 엘로힘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나타나 그 하나님, 엘로힘을 설명해주는 역할, 그걸로 오는 하나님을 여호와 엘로힘이라고 해요. 예수, 성전, 성경 이런 거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죠? 하나님의 이름이죠? 그걸 알면 하나님을 안다면서요? 성경? 하나님. 예수? 하나님이죠? 하나님을 담고 왔잖아요? 진리로. 성전? 역시 그 하나님을 설명하는 거란 말예요. 근데 눈에 보이게 나타나게.
여호와? 내 말을 네 말로 쓰자, 라는 말이라고 했어요. 하야, 라는 동사를 그대로 그냥 써버리면 여호와에요. 존재하다, 하게 하다. 근데 그걸 파자하면 내 말을 네 말로 쓰자. 성령이란 말에요.
그러면 여기서 그들이 성령을 떠나, 여호와를 떠나 여호와의 땅을 떠나 그 이름을 더럽힌다는 건 뭐예요? 그 성령, 진리의 말씀을 떠난 어떤 자들로 살게 되면 그들이 이름, 땅을 더럽히는 자가 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다, 그래요. 아꼈다. 이 아꼈다는 말은 긍흉히 여겼다, 불쌍히 여겼다는 뜻이에요. 불쌍히 여겼다. 내 이름을. 그들, 더럽혀진 내 이름들을 불쌍히 여겼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함말이란 단어가 헥트하고 멤하고 라메드에요. 그러니까 죄를 진리로 가르치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죄를 진리로 가르치면 그게 긍휼히 여기는 거예요.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께서 그 죄를 진리로 이렇게 가르쳐주셔. 그래서 그들을 건져올리는 거예요. 이걸 깨끗하게 한다, 라고 한단 말에요. 더럽혀진 자를 건져내는 거예요, 그게. 가르치셔서. 그러면 바로 그 밑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깨끗이 만드는지가 나와야 되잖아요? 보세요.
겔 36;24-28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더럽혀진 그 이름을 갖고 사는 너희들을 이제 취해서] 내고 열굴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물은 뭐라고 했습니까? 진리의 말씀, 하나님 그분 자신. 그 말씀, 맑은 물, 깨끗한 물로 이제 씻긴다는, 씻기고]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영은 뭐라 그랬어요? 말이요 생명이니까 내가 새 말, 그 진리의 말을 너희 안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에피뚜미아, 그 두 마음이 아닌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어]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역시 루아흐, 내 영이에요, 내 말을 너희 안에 두고] 너희로 내 율례룰 행하게 하리니
[이 행하게 하다, 라는 말이 아싸동사에요. 헬라어로 바꾸면 포이에오, 되게 하다라는 거지 실행해 옮기게 하다, 가 아니에요. 아싸동사는. 되게 하다. 그 율례가 네 마음이 되게 할 거야. 그러는 거예요. 네 마음이. 그러니까 돌비의 율례가 네 심비가 되게 할 거야. 이런 말이에요. 그러면 네가 깨끗해지는 거래요. 그게 맑은 물로 너를 씻는 거래요. 그것이]
그렇게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즉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에스겔서 36장은. 그래서 37장에 보면 마른 뼈, 더러운 그 먼지 풀풀 나는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 생기, 그게 물이에요, 맑은 물, 그것에 의해 일어나 군대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이름이 깨끗해지는 거죠. 거룩해지는 거란 말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고 새 언약이잖아요. 그걸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엡 5; 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물로 씻는 것을]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이렇게 이야기해요 또.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 어떻게 만든다고요?] 거룩하게 하시고 [명확하죠? 인제?]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1장에서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들을 살렸다, 아들 되게 만들었다, 그랬는데 여기서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 그런단 말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주어서. 그러니까 그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거룩하게 된 거예요, 그 이름이. 히브리서 기자는 그걸 어떻게 설명하는지 한 번 보죠.
히 10;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마음의 뿌림을 받아, 뭘 뿌려요? 물을. 우리 마음에 이제 맑은 물이 뿌려지면 양심의 그 악, 에피뚜미아, 그 마음, 여기선 에피뚜미아가 아니라 ‘시오니데시스’라는 단언데요 이게 도덕적 의식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도덕적 의식이 악이라는 걸 깨닫고, 이러는 거예요. 물을 양심, 우리 마음에 이렇게 뿌리면? 물 뿌림을 받으면, 진리의 물 뿌림을 받으면 그 시노이데시스, 그 도덕적 의식이 악이라는 걸 깨닫고 그 육체, 몸이 씻김을 받는다, 그래요. 육체가 씻김을 받아]
- 이제 참 마음이 된다, 그래요. [알레띠토스 카르디아, 진리의 마음이라는 거죠? 참 마음이 되고]
- 온전한 믿음이 된다, 그래요. [플레르 포리아 피스티스, 아까 하늘이 열리고 요한계시록에서, 하늘이 열리자 그 안에 충신과 진실이라는 어떤 이가 나왔죠? 그 단어들이 똑같이 나오네요, 또 여기. 믿음과 진리. 근데 그게 어떻게 된다고요? 우리 안에 진리의 물이 뿌려지면 그렇게 된다는 거죠. 그렇게 되어 우리가 참 마음,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진리의 말씀 이거는 여러분에게 생명과 같은 거예요. 근데 그것을 이렇게 홀대하는 사람들은 전 참 마음에 안 들어요, 하여튼. 어떤 분들은
제가 이렇게 경험한 바에 의하면 사람들이 자기들의 어떤 일상, 그리고 자기들의 그 살아가는 이 현재의 크로노스의 시간 이런 것들과 말씀을 이렇게 같이 주면 그들의 저울에서 항상 이 말씀이 너무 가벼워. 비중은 항상 그들의 인생에 있어요. 일상에 있어요. 그래서 뭐 조그만 일만 있어도 심지어 코에 여드름만 나도 안 와. 그래놓고 다음 중에 목사를 보면 되게 미안해해. 저한테 미안해할 거 하나도 없어요. 저는 말씀을 준비해서, 그 진리는 아이테오, 구하는 자에게 가게 돼 있는 거예요. 저는 내가 말씀을 준비해서 전하려고 할 때 내 앞에 있는 이 사람들이 전부에요. 여기 없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어요. 인터넷으로 듣던 말든. 여기에 있는 사람이 지금 현재에 나의 전부라니까요. 그래서 나는 여기에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에게 미안해하거나 그러지 말고 본인에게 미안해하셔야 돼요. 아니, 저는 진짜로 이게 전부에요. 여기에 최선을 다하지 여기에 없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어요. 나는요. 그러니 저에게 미안해하지 마시라니까요. 근데 안타까운 건 있죠. 그게, 이게, 이 말씀이 그거보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걸까? 이런 거. 그러니까 때때로 목회자가 낙심이 되는 건 바로 그러한 것들이에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이게 그렇게 소중하지 않을까? 이런 거.
자, 그런 일, 우리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만드는 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란 말입니다. 그게 은혜고 사랑이죠? 그걸 인정하는 자는 똑같이 우리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자기를 부인당하는 그 경험을 하게 되는 거예요.
히 10:6-14
전체로 번제함과 속제죄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성경]에 나[예수, 말씀,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성도 모두에게 해당] 하시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 율법, 예수]을 폐하심은 둘째 것[은혜, 성령]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자, 거룩하게 된 여러분. 진리의 그 말씀, 그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룩하게 된 여러분은 이미 영원히 온전함을 받은 이들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뭘 두려워하느냐고요. 영원한 온전함 속에 있는 여러분이. 두려울 필요 없어요.
이렇게 우리는 율법인 우리의 육체를 허물어트리고, 하나님께서 허무시는 거죠? 허물어짐을 당하고 은혜로 세워지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역할이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율법의 제사는 부정당하고 우리는 거룩한 산제사, 산 제물로 드려지는 거예요. 살아난 제물. 하나님은 그것만 받으세요. 회를 좋아하신다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제 죽여서 드리는 제사는 끝났다는 얘기에요. 그게 희생 제사요, 율법이라니까요. 그런데 자꾸 자기를 죽이려고 그래요. 자기의 옛날에 저질렀던 잘못으로 자기를 죽이고 수고하고 무거운 율법의 짐으로 자기를 죽이고 그러면 하나님이 그냥 측은하게 여기고 기특하게 여기실 거라고 생각해. 산제사를 받으신다니까요,
하나님은 이제. 산자들아 와라! 그런단 말에요. 산자들아 와라. 죽은 거 이제는 예수 안에서 다 영 단번에 드려졌잖아? 이렇게. 계속 자기를 희생시켜갖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진정 진리를 올바로 이해한 성도들이 맞다면 우리가 그 진리를 그 깨끗한 말을 내 마음으로 갖게 되는 그것보다 더 간절히 원할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기도의 서두에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율법이 아닌 진리로 깨달아져서 우리의 마음이 되는 거, 참 자유를 주는 거 그게 우리의 진짜 원함이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그렇게 시작되는 거예요. 율법으로 더러워졌던 그 말씀, 그 이름이 우리 안에서 하지아조, 거룩하게 되는 거 그게 여러분의 바램이고 원함이 맞습니까? [아멘] 네, 그걸 기도하세요. 그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 그건 우리들의 그 청유이전에 하나님이 완성하신, 우리들의 그 묵시 속 완전한 상태, 그게 거룩하게 된 이름들, 말씀들 그들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 내 안에 계신 그 하나님께 두려움이 아닌 감사함으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대상들이란 말에요. 기도하기가 점점 힘들어지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하늘들 안에 계신 그 아버지,
아버지, 당신께서 나를 아들로 이렇게 낳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율법도 나를 묶지 못하고 세상의 판단과 그들의 평가도 나를 묶지 못합니다.
하나님, 그 자유, 말씀 안에서 그 자유를 더욱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성수 목사 > 산상수훈'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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