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성수 목사/산상수훈

39.나는 지금 제대로 된 양식을 먹고 있는가?

Hebrew 2023. 5. 20. 22:25

산상수훈 39번 말씀

제목 : 나는 지금 제대로 된 양식을 먹고 있는가?

본문 :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아멘.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게 문자 그대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기도라면 우린 너무 많은 걸 구하고 있는 거죠? ‘일용할’이 뭐에요? 한국말로 하면? 하루의 양식이죠? 하루에 쓸 양식. 근데 하루에 쓸 양식만 구하십니까?

우리는 지난주 까지 진리를 마음으로 가진 성도들의 상태에 관해서 공부를 한 겁니다. 성도는 씨가 없는 자. 생명이 없는 자로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의 씨로 받아서 아들이 되는 거라고 그랬죠? 그 상태가 되면 그들은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라는 뜻이라고 했어요. 그 하늘들 안에 나를 낳는 진리의 말씀, 그걸 아버지라 그러니까. 그 아버지를 갖게 되는 거고, 그 상태가 되는 거고. 그러면 그 이름, 그 이름 쉠은 말씀이라 그랬습니다. 계시록에서 분명히 이야기해주죠? 그 말씀, 그 이름이 깨끗하게, 하기오스, 거룩하게 된 자들이고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 흙에 불과한 나에게서 그리고 이 역사, 크로노스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그 하늘의 뜻이라고 그랬죠?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는 우리의 상태라 그랬습니다. 그죠? 이미 여러분이 그렇게 돼있는 거죠. 그래서 그 하나님의 그 섬김, 그 진리의 섬김 그 말씀의 섬김 그 통치, 성경에서 사실 그 통치, 다스리다, 라는 그런 개념은 없어요. 섬김의 개념밖에 없어요.

하나님 나라에는 다스림, 통치가 섬김이에요. 그렇게 되면 그 말씀에 의해 내가 섬김을 받게 되면 그게 바로 내가 나라가 되는 거잖아요? 그게 바실레이아 거든요. 그 바실레이아, 그게 바실리우스, 왕이라는 단어하고 그게 어근이 같은데,

왕이라는 단어가요 한자도 마찬가지에요. 하늘, 땅, 사람. 이렇게 썼습니다, 원래. 원래 글자가. 그것이 하나로 통하면 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원래 이거는 1이라는 숫자로 썼습니다, 옛날에요.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하나가 되면 여러분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거예요.사실은.

그래서 그렇게 우리가 그런 상태가 되려면 우리에게는 그렇게 되기 위한 어떤 에너지, 양식이 필요하겠죠? 그래서 이제 그 상태 바로 다음에 양식에 관한 청유가 나오는 거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세요, 라고 기도하라는 거죠.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주기도문에 모든 청유, 피티션은 Already but not yet의 그 눈으로 봐야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건데 이 땅에서 우리는 그 완전한 것, 우리에게 주어진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자가 된다는 거죠.

그게 Already but not yet 이죠, 그죠? 그래서 전부 부정과거시제 명령형으로 동사가 쓰였다, 그랬어요. 그거는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시제라 그랬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공부할 그 일용할 양식에 관한 것도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대한 그런 확실한 긍정, 나에게 이미 주어졌어, 라는 그런 확실한 긍정과 그러한 긍정을 더욱 공고히 하는 간절한 청유, 그렇죠! 그거죠. 그거 없으면 안 되는 거죠! 라는 이 청유. 근데 그걸 나에게 주셨네요? 라는 그 긍정, 그렇게 봐야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양식을 주세요, 나에게 그 떡을 주세요. 그 양식이 알토스, 떡이거든요. 떡, 양식 같이 써요, 그냥. 그 떡을 주세요, 양식을 주세요, 라고 기도를 할 수 있는 그런 이, 그런 이가 반드시 거치게 되는 과정이 뭐겠어요? 누가 양식을 달라고 해요? 거지도 배부르면 양식 달라고 안 그럽니다. 당연히 굶주림입니다. 배고픔이에요.

지독하고 처절한 굶주림을 맛보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로 먹을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게 아담들의 자존심이에요. 선악과 먹고 하나님처럼 된 아담들의 자존심. 그래서 주님은 주린 자가 복 있어,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왜냐면 절대로 주리지 않아요. 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의 것들로 자기의 주림을 채우려고 하지 나는 주린 자야, 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게 아담들의 속성입니다.

눅 6: 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여기 보면 ‘이제’ 라는 단어 있죠? 그게 ‘눈’이에요. 지금. 누니데, 그러나 이제는, 에서 쓴 그 단어. 그죠? 눈. 지금 여기에서 주린 자가 복이 있다, 그래요. 이제, 라는 말은 크로노스의 이 역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에서 자기들이 주린 자라는 거. 그런데 이 주림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 다른 차원의 어떤 것이 오기 전에는 주린 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걸 아는 자. 그 자가 복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주린 자가 맞네요. 라고 인정하는 그 자가 복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이제’ 눈이라는 말은 그날이나 그 때의 반대 적 개념으로 보시면 돼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굶주린 자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떡을 먹고 그 날, 그 때의 떡으로 양식을 먹고 여기에서 배가 부를 거예요. 물론 영적인 이야기인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서 내가 주린 자라는 걸 반드시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세메론’,그 날의 양식을 구하라, 라고 되어 있는 거예요. 세메론이 뭐라 그랬죠? 그때도 한 번 말씀드렸는데.

거기 보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이라고 그러죠? 그 오늘날이 오늘이란 말이 아니라요, 그 세메론이라는 단어는요 그 날, 그 때의 양식이에요. 그러면 여기의 양식은 아니라는 거죠? 그죠?

그러니까 이제, 여기에서 그 눈이라고 그러잖아요. 이제 여기에서 굶주린 자는 복이 있다, 그랬으니까. 그러면 그 사람들은 여기에서 양식은 못 찾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그 날, 그 때, 거기의 양식’을 찾게 되겠죠? 이게 주린 자라는 뜻이에요. 그들이 복이 있다,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 굶주림을 지금 경험하고 계시냐고요? 아, 나는 그거 없으면 안 돼. 라는 그 굶주림.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애굽에서 건져내온 당신의 백성들을 이 광야, 그것을 스테반이 광야교회라고도 이름 하는데 이 광야는 그냥 크로노스의 인생, 역사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걸 숫자로 바꾸면 40입니다. 그게. 그 광야에서 하나님이 일부러 의도적으로 굶주리게 하고 목마르게 해버리셨어요.

신 8: 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울 너로 알게 하심이니라

보세요, 하나님이 굶주리게 하셨다고 그래요. 광야에서. 굶주려요? 여러분 진짜? 지금 살을 어떻게 빼야 될까 고민 중이죠? 다?

그럼 이 굶주림은 무슨 굶주림이겠어요? 그 굶주림은 아닐 거 아네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게 아니라, 떡 먹으면 이렇게 살찌는 거예요. 떡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거라는 거, 그게 양식이야! 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굶주리게 만드셨다는 거예요. 당신 백성들을. 그러면 그 백성들은 그 굶주림을 경험해야 되는 거죠? 그리고 인정해야 되는 거란 말에요. 그런 하나님의 의도적 기근은 아모스서에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암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먹을 건 많다는 거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그래서 나중에 보면요, 창세기에서도 요셉이라는 인물이 나중에 예수라는 아들을 낳는 어떤 완성의 인물을 설명하는 게 요셉이거든요. 그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넷, 거기에서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럼 그 사람은 어떤 양식을 줄 수 있는 자가 돼야죠?

그래서 그 기근이 든 애굽에서 모든 양식을 그에게 맡기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양식을 나눠주게 만드는 거예요.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뭐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더니 양식, 세상에 양식을 관장하는 사람이 되더라, 는 성경이 관심이 없어요. 성경은 이 양식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요셉을 통해서도.

그렇다면 성도는 이 광야 인생길에서 말씀이라는 양식, 하늘의 그 떡이라는 그 양식에 굶주려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그 날의 그 양식을 나에게 주세요, 라는 기도를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그 기도를 할 수 있는 이들을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했죠? 푸토코스.

그거 없으면 나 죽어요. 푸토코스라고 그랬어요. 페네스는 상대적 가난 푸토코스는 절대적 가난. 그 성령 안에서 말씀 안에서 진리 안에서 정말 가난한 자, 그거 없으면 나는 죽어요, 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가 푸토코스, 그 자가 복이 있다, 라고 이야기했잖아요?

그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려야 하는 게 성돈데 성경은 그 말씀, 그 진리를 또 의라고도 해요.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조금 전에는 말씀에 굶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그랬어요. 근데 그걸 이제 의라고 이야기한단 말에요. 성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야 하는 거예요. 잘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은 이 역사의 굶주림을 말씀에 대한 굶주림이라고 했어요. 역사가 이렇게 어둡고 이렇게 추악하고 이렇게 공허한 건 말씀에 굶주림 때문이지 그건 너희들의 힘과 노력으로 채울 수 있는 굶주림이 아니라는 걸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말씀에 대한 굶주림, 그 말씀을 성경이 의라고 한단 말에요. 그러면 반대로 인간들이 그 말씀이 아닌 그 진리,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닌 인간 측에서의 어떤 것들을 동원하여 인간들의 그 굶주림을 채우려고 하는 모든 시도와 나타난 현상이 다 뭐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의라면? 이건? 죄라는 거예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죄 그러니까 자꾸, 게시판에 보니까 뭐 또 아담이 의인이냐, 죄인이냐 이런 질문도 하셨던데 황동억 집사님 미안해요. ㅎㅎㅎ. 죄는 뭐고 의는 뭐에요? 여러분. 이제는 여러분이 그 정도의 개념은 딱 정리를 하고 계셔야 돼요. 죄라는 건요, 그냥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 인간들이 합의하여 그건 악한 거니까 하지 말자, 라고 금한 걸 하는 걸 죄라고 하지 않아요. 성경은. 성경이 말하는 죄라는 건, 물론 그것도 죄죠. 인간이 행하는 것 중에 죄 아닌 게 어딨어요? 죈데, 죄라는 건 하나님이 하늘의 그 진리 있잖아요? 예? 하늘의 그 진리. 하늘의 그 진리를 우리에게 그냥 못 주세요. 왜냐하면 현상계, 물질계는 초월적인 그 세계의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그것을 주기 위해 이 땅의 인간들이 갖고 있는, 피조세계가 갖고 있는 가장 흔한 어떤 것을 들어서 그것을 설명해주셔야 돼요.

그랬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 아래의 것, 그 하늘 아래의 것을 들어 그 위의 것을 설명해주려고 나타난 형상으로 준 모든 것 있죠?

그것들을 그걸 통해서 하늘의 것을 알아야 되는데 그냥 그것들에 묶여 있으면 그걸 죄라 그래요. 성경에는. 그러니까 한 번 보세요. 그러면 이 죄, 그 아래의 것을 통해서 그러면은 우리가 위의 것을 알아버렸어요. 그러면 그걸 의라고 하거든요. 위의 것을 알아버렸어요.그러면 이 반대편을 의라고 한단 말에요. 그러면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 죄라는 건 없는 거네요. 이걸 알기 위해 그걸 준 거니까. 그러면 죄가 없는 상태에서 이 의라는 건, 이게 개념이 통해요? 이게?

의라는 게 뭐냐면 죄가 아닌 그것이 의거든요. 그러면 나에게 죄가 없으면 죄가 이게 의를 알게 해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래의 것으로 모형으로 주신 것이 죄라면 그걸 알아버렸어요. 그러면, 이게 나에게 상관없어지면 그걸 용서라고 해요. 그러면 죄가 없는 상태에서 의도 없어요.

보세요, 그럼 아담, 하나님은 아담을 통해서 우리에게 아들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려고 해요. 하나님의 백성이 뭔지를 그런데 아담이 그 아래의 것, 사람에서 그냥 머물러 버리면 그러면 이게 죄인이라고 해요, 이거를. 근데 이 아담이 아, 나의 부끄러움, 나의 존재의 완성은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위하여 자신이 준비하신 그 제물의 그 껍데기, 그 옷으로 가려야 나는 비로소 죄인에서 벗어나 의인이, 아들이 될 수 있는 거구나! 라고 알았어요. 그러면 이 아담은 의인이 되는 거예요, 즉시. 그럼 그 사람에게 있어서 이 죄는 없는 거예요. 그러면 아담이 죄인이다, 의인이다 이런 거를 묻는 게 옳아요?

아담은, 진리를 알았으면 죄인도 아니고 의인도 아니에요. 그냥 그거에요. 아들. 그 아들을 설명하기 위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그냥 나타난 형상 그걸 그 형상으로 이해해버리면 죄인이고 그것으로 그가 아들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면 그걸 의인이라 그래요.

근데 그 죄가 개념이 없어진 상태에서는 의인도 없다니까요. 그냥 아들 그분 그러는 거예요. 자 쉽게 말해서 성도는 이러한 인간 세상의 악함과 공허와 추함과 어두움의 그 해결책을 그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구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그런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진리의 영의 간섭 하에 들어간 사람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반응이요 추구인 거예요. 보편적 아담들은 이 역사와 인생의 배고픔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열심히 달려요. 도덕과 윤리와 발전, 성숙, 번영, 평등, 평화 뭐 이런 걸로 역사와 인생의 배고픔을 채우려고 해요.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들의 힘으로. 성경은 그러한 보편적 아담들의 시도와 추구 뭉뚱그려서 율법, 혹은 행위라고 이름하고 그걸 죄라고 한단 말에요. 과녁을 벗어났네? 이렇게. 그건 헛배를 부르게 만드는 공갈빵 같은 거예요. 그럼에도 인류는 그러한 것으로도 이 역사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메뉴들을 생산해냅니다. 개발하고 생산해내요.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같은 이데올로기 교육 종교 과학 문명 선행체계, 지식체계 등을 생산해내고 창조해냅니다. 여러 가지 메뉴들을 개발하고 만들어서 역사를 먹여요, 끊임없이. 인간들은. 그리고는 배부르다, 하면서 자기들을 칭찬한다고요. 그러면 여기에서 배부른 자들은? 복 받은 자 아니죠? 하나님이 이렇게 얘기하세요.

눅 6: 25

와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 하도다.

주님은 지금 이 크로노스의 역사 속에서 자기들이 배고픈 자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은 영원한 주림, 영원한 주림이 뭐에요? 우리는 뭘 먹어야 그걸 에너지 삼아 사는데 영원한 주림이라는 건 죽음이란 뜻이에요. 그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반면에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땅의 소산으로도 우리의 생명 양식을 삼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그런 영적 굶주림과 가난함 속에 있는 이들은 하늘의 풍요로 채워져 있는 자라는 역설을 던지신단 말에요.

계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이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양식을 얻어서 생명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실상은 하늘의 부요가운데에 있는 이들이란 거예요. 근데 그러한 하늘의 부요의 반대편에 있는 이들이 누구라고 해요? 자칭 유대인이라고 해요. 그걸 바울이 표면적 유대인이라고 했죠? 그냥 표면적 유대인은 뭐죠? 율법주의의 대표로 잠깐 등장했던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냐?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지. 그랬다고요. 그럼 이면적 유대인 안에는 우리도 들어가는 거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의미니까. 그죠?

그 표면적 유대인, 율법주의의 대표로 등장했던 그들을 성경이, 하나님이 뭐라고 부르시느냐 하면 사단의 교회, 그래요. 사단의 회라고 번역을 해놨는데 그 회가 스나고게거든요. 회당, 교회란 말이에요. 교회는 교횐데 사단의 교회가 있어요. 사단의 교회가 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 이 땅의 것들로 배 부르려고 모여 있는 자들, 그리고 그게 신앙생활인 줄 알고 열심히 달려가는 그 사람들. 사단이라는 말이 그냥 대적자라 그랬잖아요? 사단의 교회는 교회의 모양은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전해서 목적지를 잘못 잡게 만들어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달리는 거, 그걸 사단의 교회라고 그래요. 중들은 아예 관심도 없어요, 우리한테요.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니까요. 사단의 교회는 교회에 있다고요, 교회에.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엉뚱한 양식을 추구하고 그 양식으로 배불리면 그건 졸지에 사단의 군대가 되는 거예요.

자, 그럼 지금부터 본문의 내용을 제가 하나, 하나 풀어보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양식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경계해야 할 양식은 무엇인지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한 번 공부를 해보죠.

오늘 본문을 원문으로 보면 ‘호 아르토스 에고 호 에피오시오스 디도미 에고 세메론’ 이에요. 그러니까 호 알토스가 떡 이거든요. 그 양식.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맨 앞에 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주제는 뭐예요? 핵심 키는 떡이에요,떡. 양식. 근데 그 떡은 에피오시오스의 떡이래요. 에피오시오스. 에피오스오스가 뭐냐면 그 에피라는 단어가 이게 어디, 어디 위에, 라고 했죠? ‘아나’ 라는 것은 탈공간 적 위, 저기 위 그 하늘의 것 이런, 그래서 뭐 아노뗀 그러면 위로 나다, 거듭 나다 이런 거라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에피’는 이제 그거 보다 공간 적 어떤 위에요, 위. 위의 것, 위의 양식. 양식인데 어떤 양식이냐면, 그러니까 위의 것으로 있는 양식. 이게 이렇게 요 단어의 합성어거든요. 이게 Be 동사거든요. 영어로 따지면.

그러니까 위의 것으로 있는 그 양식. 이게 일용할 양식의 일용 할이에요. 에피오시오스. 그런데 이렇게 써놓고 뭐라고 읽느냐면 꼭 필요한, 생존을 위한 이렇게 써요. 그런 의미로 쓴다고요. 위에 존재하는 그것. 이라고 써놓고 꼭 필요한 거, 생존에 필요한 거, 이런 의미로 쓴다고요. 그러니까 꼭 필요한 거 생존에 필요한 건 위에 있는 그것, 이런 말이에요. 근데 이걸 그냥 꼭 필요한 것, 생존에 꼭 필요한 것, 이거는 이 의미는 모르고 그냥 꼭 필요한 거, 생존에 꼭 필요한 거, 요렇게만 우리가 써버리면 일용할 양식은 뭐예요? 에피오시오스 호 알토스는?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사는데 꼭 필요한, 여기에서의 생존에 꼭 필요한 그 양식을 주세요, 라는 말이 되죠? 그러니까 이,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피티션, 이 청유를 갖고 그런 기도만 한단 말에요. 내가 먹을 거, 이 땅에서 내가 필요한 거 그걸 주세요, 라고 기도한다니까요. 그럼 아예 진짜 확실하게 오늘 것만 구하던가. 그것도 아니잖아요? 만약에 이게 그런 기도라면 바로 밑에 있는 이 구절과 충돌을 하는 거예요.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여기 보세요. 바로 위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그러고 바로 밑에서는 뭐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마, 이게 말이 돼요? 예수님이 일구이언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성경 자체가 충돌한단 말에요. 그러니까 적어도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일용할 양식은 육적 생존에 필요한 먹을 것과 마실 것은 아니잖아요? 이 부분을 아람어 성경으로 보면,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떡을 주옵소서”, 라고 되어 있어요. 이 내일이라고 번역이 된, 사용이 된 아람어 ‘마헬’은 어제 오늘 내일의 그 내일이 아니라 다가올 날 차원이 다른 이 시대가 아닌 다른 세대의 그 날, 이런 뜻이에요. 그 날의 떡으로 나에게 주세요. 그래서 그걸 에피에이미, 에피오시오스, 위에 있는 그거,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에피오시오스. 일용 할이 아니라니까요. 차원이 다른 그런 시대에 그 떡. 이런 말이죠. 아래의 떡이 아닌 위의 떡. 이 크로노스의 역사의 떡이 아닌 카이로스의 떡. 이런 말이에요. 그러한 내일의 떡에 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는 곳이 출애굽기죠? 거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내일의 떡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출 16:2-5

이스라엘 온 회중에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율법은 토라에요, 토라]

제 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자, 육일 째에는 내일의 양식을 미리 준다, 그래요. 내일의 양식, 안식일의 양식 그리고 그 양식은 일용할 양식 이렇게 인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모세에게 떡을 요구하죠? 근데 어떤 떡이라 그래요? 애굽에서 배불리 먹던 떡이라 그러죠? 자, 애굽의 떡을 달라는 거예요, 지금. 광야에서. 그리고 그 떡과 함께 먹었던 고기도 그리워해요. 고기 가마 곁에서 앉아서 먹던 떡. 근데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 2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 가마 옆에서 떡을 먹었던 기억을 함께 공유하고 있어요. 그들이 모두 공히 고기 가마 옆에서 떡을 먹었지는 않았을 거 아네요? 다 그렇게 뭐 똑같은 경험을 하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근데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청원으로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에요. 고기 가마 옆에서 떡을 먹었을 때의 그 떡이라고 얘기한다고요. 근데 이스라엘이 적어도 광야에 나온 사람은 전부 그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언제입니까? 유월절에!

유월절에 어린 양을 잡아서, 인수대로 잡아서 뼈는 꺾지 않고 그 고기를 다 먹으라고 했어요. 다 먹고 그와 함께 무교병을 같이 먹었죠? 쓴 나물도 먹고. 그러면 고기 가마 곁에서 앉아서 먹었던 그 떡은 유월절의 그 고기와 그 떡을 이야기하는 거겠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고기 주세요, 고기 주세요! 했을 때 그 고기는 유월절 어린 양이라는 그 고기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전체가 공히 경험했던, 먹었던 그리고 그리워하는 그 고기. 예수라는 고기란 말에요. 예수의 살. 그건 먹어야 되는 거 아닌가?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자, 그 육신의 떡과 그 육신의 고기, 어린 양의 그 고기와 무교병을 육신이 고기, 육신을 위한 고기, 나를 위한 고기 나의 구원을 위한 고기, 나의 육신을 위한 떡 그걸로 그냥 받아먹으면 그건 죽음의 고기, 죽음의 떡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광야의 떡, 즉 만나를 그냥 만나로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하나님이 주긴 줘요. 주는데 그걸 의미로 먹지 않고 떡으로 받아먹으면, 만나로 먹으면 죽는다고 그런다니까요. 만나라는 단어 뜻이 ‘이게 뭐야?‘ 잖아요? 그러니까 모르고 먹으면 죽는다니까요.

What is this? 가 만나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을 줬는데 그걸 의미로 못 먹고 그냥 율법으로 껍데기로 먹어버리면 그걸로 죽는다니까요. 그래서 만나에요, 이름이. 그 만나는 하나님이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지들이 지은 이름이에요. 왜? 이건 뭐야? 아무도 몰랐거든요. 그게 만나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4절에서 그 광야의 떡을, 아 요한복음 6장 49절 보세요. 이거 보고 가죠.

요 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만나를 먹고 죽었다, 라는 말이에요. 만나를 그냥 만나로 먹어버리면 그거 먹고 죽는다는 거죠. 만나는 하나님이 준 거예요.

마귀가 준 거 아닙니다. 근데 그걸 진의대로 못 먹으면 죽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광야에서 주어지는 그 떡과 고기는 육신을 살찌우고, 이 육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육신을 빛나게 하는 그런 떡과 고기여서는 안 되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성숙시키고 변화시키고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드는 데에 사용되면 안 되는 거예요.

잘 새겨들으셔야 돼요. 그것이 목적이 되면 안 돼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사랑과 능력과 은혜를 깨닫는 데에 도구로 쓰여야 되는 것이지 나를 증명하고 나의 가치를 상승시키는 도구로 사용되면 그게 내 육신을 살찌우는 만나가 돼버리는 거란 말입니다. 그건 내일의 떡 아니죠. 여기의 떡이죠. 그리고 그거 먹으면 여기서 배부르게 되는 거고. 그러니까 말씀을 육신으로, 법으로, 율법으로 받아버리면 그 사람은 그 말씀을 먹고 죽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4절에서 그 광야의 떡을 뭐라 그래요?

‘내가 떡을 비 같이 내리겠다’ 그러는데 그거 마타르레헴이라는 그 단어는 비로 내리는 양식이란 뜻이에요. 내가 너희들에게 만나를 주는데 그 떡은 비로 주는 거야. 라고 이야기한다니까요. 그건 그냥 떡이 아니라 내가 그 떡을 비로 주는 거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게 마타르레헴이에요. 그럼 비가 뭐길래?

신 32:1-2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비로다

비는 뭐예요? 진리의 말씀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주는 그 떡, 그 예수 그 양식을, 그 말씀을, 그 성경을 진리의 비로 받지 못하고 그냥 나의 유익을 위한, 나를 증명하기 위한 그런 양식으로 받으면 너희는 그거 먹고 죽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럴 거면 차라리 절에 가라, 그러는 거예요. 달마사로 가든지 관음사로 가든지 우리 집 앞에 절이 세 개나 있더라고요. 그 옆에 교회도 있어요, 바로, 한 건물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만나를 비로 내리시는데 그걸 비로 받지 못하면 여러분은 그 비에 맞아 죽어요. 그게 노아의 홍수사건이에요.

그런데 그건, 그 비는 우리의 기식하는 푸시케, 육을 죽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사건 때 기식하는 모든 게 죽었다고 하는 거. 기식하는 거는 그 단어 자체가 푸시케에요, 육신이에요. 그러니까 은혜의 비가 내리면 육신이 죽어요. 근데 그걸 예수님의 육신이 우리의 대표로 먼저 죽어준 거예요. 그걸 노아의 홍수사건이 그냥 알기 쉬운 그림으로 그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빠져죽은 기식하는 것들은 나에요, 나. 그리고 그렇게 빠져죽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하나님 나라, 그 안에 들어가 살아나는 거예요. 영으로 물 위의 것으로. 동동 떠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만나, 말씀은 우리를 죽이는 거여야지 우리를 시퍼렇게 펄펄 뛰게 만드는 것이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도 이 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라고 그 말씀을 거기에다 붙여놓은 거예요. 내가 이렇게 떡을 이렇게 주는 건 그들이 이 율법을 마음으로 간직하나 아니면 그냥 법으로 받아서 열심히 뛰나 이걸 시험하려고 주는 거야,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금.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내일의 양식, 차원이 다른 양식으로 받아야 하는 것을 이제 안식일 전날 거두는 육일 째의 양식으로 또 한 번 보여주는 거예요. 안식일이라는 건 하나님께서 홀로 완성하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상징하는 거죠? 그런데 그 나라에서의 그 양식을 여섯째 날의 그 자칼과 레케바 있죠? 그 자칼과 레케바라는 게, 레케바가 여자고 자칼이 남자니까. 근데 그 남자 자칼이 씨로 오는 거잖아요? 그래서 세 번째 날과 여섯째 날이 짝이니까. 이제 뭐 그건 설명 안 해도 이제 다 아시겠죠? 그러니까 그 이들이 내일의 양식을 거둔 자들이란 뜻이에요. 그래서 육 일째에 ‘그 내일의 양식’을 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아, 우리에게는 반드시 ‘그 내일’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우리의 인생이.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내일의 양식이 오늘 온 거 아니에요? 내일이 없는데 그 때의 양식이 왜 오냐고요, 나한테? 뿐만 아니라 그 양식이 오늘 나에게 주어졌다는 건 이 코로노스의 역사 속에서 그 내일을 조금씩이라도 맛 볼 수 있단 뜻이에요. 감정적으로 뭐 좋고 행복하고 편안하고 이렇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는 이 땅에서 분명히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현실 천국, 잠깐, 잠깐 오는 거지만 그걸 우리가 진리 안에서 맛 볼 수 있단 뜻입니다.

그러나 그 하늘의 양식, 그 내일의 양식은 이 땅의 것 안에 담겨져서 우리에게 주어지죠? 성전, 예수, 성경 호코스모스의 세상. 사람,원리, 법칙 이런 것에 담겨서 나타난 것, 인식되는 것 안에 담겨서 우리에게 주어진단 말에요. 왜냐면 하늘의 것은 직접 땅에서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고 그랬습니다. 우리에게 직접 쏴진다면은 그 하늘은 거룩한 것이 아니죠? 아니, 땅도 담을 수 있는 게 뭐가 거룩이에요? 그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 거룩, 그 깨끗한 것, 그 거룩은 이 땅의 것 안에 담겨져서 우리에게 주어진단 말입니다.그것으로 하늘의 계시를 하늘은 우리 수준만큼 계시한다고 그랬어요. 그 계시를 깨달아 알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하늘의 양식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출 16:6-7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르되 저녁이 되면 [에베브]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섰음을 알 것이요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대 너희가 누이를 대하여 원망하느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가 여기 똑같이 나오죠? 에레브 보케르, 똑같은 단업니다. 그런데 저녁에는 뭘 안다고 그래요? 저녁에는? 제가 창세기 1장을 설명해드릴 때 저녁은 뭐라 그랬죠? 에레브란 단어가 덮음, 어두움, 감추어진, 비밀 이런 뜻이라고 했어요, 저녁, 에레브가. 그러니까 이 아래의 것이죠? 그죠? 이 아래 것으로 그 위의 것을 알면 우리가 그거를 보케르, 아침, 활짝 열림, 현명해짐, 이런 뜻이란 말에요. 근데 저녁, 에레브 때는 어떻게 한다, 그래요? 뭘 안다, 그래요?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안다, 그러죠? 무슨 말입니까? 아, 우리가 애굽에서 나갈 수 있는 건 우리의 힘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구나, 라고 저녁 때 안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그 저녁을 잘 견뎌내면, 인내로, 휘포모네, 이겨내면 아침이 오는데 그 아침에는? 여호와의 영광을 호라호, 본다는 말입니다. 그게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된 건 우리에게 오는, 닥치는 필연적 과정이라니까요. 그러면 하나라고 해. 이게 첫째 날이잖아요? 그 때는 뭐 일이삼사 없으니까 첫째 날은 아니겠죠? 그걸 하나라 그래. 그걸 통일이라 그래요. 연합이라 그래.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자, 그렇게 저녁 때 우리가, 아, 우리는 여호와의 은혜로 그분의 능력으로 애굽에서 나온 거지, 라는 걸 알게 되는데 그 저녁의 양식으로 그걸 안다면 저녁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준 게 율법이니까. 우리는 율법으로 그걸 알아야 된다. 그랬죠?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거예요.우리는 율법으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걸 알면 돼, 라고 이야기 한 거예요. 그런데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저녁에 먹을 양식은 고기, 바싸르인데, 고기라 그러고요 아침에 먹을 양식은 떡이라고 해요.

출 16:8

모세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출 16: 12-13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나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이슬은 말씀이죠? 그죠? 저녁의 양식은 고기 아침의 양식은 떡 그래요. 그런데 성경은 고기든 떡이든 그걸 전부 그냥 양식, 떡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떡을 양식을 고기로 먹는 자와 그 양식을 떡으로 먹는 자가 있다는 거예요. 근데 고기로 먹는 자는 저녁의 사람, 떡으로 먹는 자가 아침의 사람이에요. 근데 그 저녁의 고기를, 그 고기를 아침의 떡으로 먹게 되면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되는데 저녁의 고기를 끝까지 고집하는 그 사람은 그 고기를 먹고 그건 저녁에, 에레브의 양식이니까. 저녁의 사람으로 죽는 거예요. 유다가 저녁으로 나갔다, 그러죠? 밤으로 나갔다. 밤의 양식을 먹고. 그래서 그 유다가 받은 건 부스러기에요. 율법을 상징하는 부스러기.

딴 제자들은 덩어리로 줬는데 꼭 유다에게 준 것만 부스러기란 단어를 쓴단 말에요. 율법이라는 말.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고기를 먹는 자들은 전부 죽어요. 하나님이 분명히 준다고 그랬어요. 얼마만큼 주냐면요 두 규빗, 90cm입니다. 90cm씩 쌓아서 하루 길, 얼마나 많아요? 메추라기가. 그렇게 줘놓고 그걸 씹기도 전에 다 죽여 버려요. 그게 준 거예요, 안 준 거예요? 주긴 주는데 먹고 죽으라고 주는 거예요. 저녁의 양식은.

민 11:4, 18, 31-34

이스라엘 중에 섞여 가는 무리가 [섞여 사는 무리가 앞에서는 중다한 잡족이라고 번역 됐어요] 탐욕을 품으매 [자, 탐욕, 탐욕을 품었어요. 탐욕을 품으니까 뭐를 달라고 해요? 고기를 달라고 해요.]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18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있었다 하는 말이 [애굽이 우리의, 재미있었다, 라는 말이 토브에요. 아이 뭐 재밌다! 가 아니라 애굽이 우리의 선이야! 이런 말이에요. 토브가 선이니까.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단어란 말에요, 이게 애굽에서 우리에게 선이야, 라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애굽이 선이면 그들은 죽는 거예요. 거기서 끄집어내는 게 구원인데. 그래서 하나님이 그래? 그러면 너희들은 고기 먹어라! 그리고 주는 거예요.

31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

[이 바람이 여호와에게 로서 나왔다, 라는 게 르하 낫사 에트 여호와에요. 이게 뭐냐면, 바람, 르화, 이거는 성령이죠? 르와흐, 성령이 낫사, 낫사가 뭐냐면 이스라엘이 성막을 짊어지고 가다가 하나님이 여기에다가 풀어, 그러면 성막을 딱 짓죠? 하나님 나라가 되는 거예요. 상징이죠? 다시 출발해! 그러면 출발하다, 있죠? 이 단언데. 출발하다가 뭐냐면 기둥뿌리를 뽑아버리다. 파괴하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내내 한 게 뭐냐면 성전을 파괴하고 다시 세우는 거 파괴하고 다시 세우는 게 뭐라 그랬어요? 카라, 라는 단어를 제가 설명해드렸잖아요? 그게 부르심이라니까요. 성전, 그 성전을 파괴하고, 성전으로 오신 예수가 파괴되고 다시 사는 그것. 그것을 이스라엘이 낫사, 세웠다가 기둥뿌리 뽑아 파괴하고 또 세웠다가 파괴하면서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았어야 되는 거예요. 그게 낫사에요. 그러니까 르하, 성령이 낫사, 그렇게 기둥뿌리를 뽑아 파괴하려고 에트 여호와, 여호와로 그들에게 오다, 이런 말이에요. 지금.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서 ]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그래요. 메추라기가 바다에 삽니까? 바다는 뭐라 그랬어요? 저주의 바다, 아래의 것이죠? 그것이 와서 우리에게 들어오면 죽는 거예요. 그래서 그 고기를 바다에서 왔다, 그러는 거예요.]

-진 곁 이편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그게 땅, 파님이거든요. 에레츠 파님, 그러니까 땅에 나타난 것]

-지면 위 두 규빗 쯤에 내리게 한지라

32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가리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오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펴 두었더라

33 고기가 아직 잇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34 그 곳 이름을 기브룻 핫다아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 이었더라

기브룻 핫다아와 이게 키브로트 하타아바 거든요. 키브로트가 캐배르, 무덤, 매장지란 뜻이고 하타아바가 타아바, 탐욕, 욕망이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의 욕망의 무덤. 고기를 먹고 육신이 죽는 거예요. 인간의 욕망의 무덤. 그러니까 저녁의 양식인 고기는 탐욕의 떡이요 죽음의 떡인 거예요. 그거는 내일의 양식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그리워했던 고기 가마의 그 고기가 무슨 고기였다고 그랬어요? 유월절 양 고기요. 그걸 공통적으로 다 먹고 나왔다니까요.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이 합심하여 그 고기를 그리워하는 거란 말에요. 근데 하나님이 그 고기의 대용으로 어떤 고기를 주어서 너희들 이거 먹으면 이게 저녁의 양식이고 이건 죽는 거야! 광야에서 이거 먹으면 죽는 거야!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거는 애굽에서 먹고 나와야 되는 고기지 광야에서도 그 고기 먹으면 안 돼요. 광야에서는 뭐 먹어요? 무교병 먹어요. 떡 먹는다니까요. 그래서 유월절, 그리고 유월절 양 잡는 그 시간이 무교절로 이렇게 물리는 거예요. 유월절에 고기 먹었으면 이제 무교절, 칠일 동안에 무교병 먹는 거예요. 떡 먹는 거예요, 떡. 만나 먹는 거예요. 비로 내리는 만나. 그냥 ‘이게 뭐야?’ 라는 만나가 아니라, 율법의 만나가 아니라 비로 내리는 은혜의 그 만나를 먹어야 되는 건데 고기를 계속 추억하면 어떻게 된다는 거예요? 또 다시 유월절로 돌아가서 그 고기에, 그 어린 양의 그 살과 피만 의지하는 거예요. 희생 제사 적 섬김, 거기에 머물러 버리는 거예요. 교회에서 광야에서. 그러니까 맨 그냥 이 천 년 전에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셨대. 그분이 살과 피를 내게 먹이셨대. 그리고 맨날 성찬식만 해.

근데 그게 옳은 거 같죠? 근데 그게 여러분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냥 전설이라니까요. 생명을 주시는, 진짜 치유를 하시는 그분이 오셨는데, ‘전설에요, 천사가 내려와서 저 물을 한 번 동할 때 제일 먼저 내려가는 사람이 낫는대요.’ 이러고 앉아있는 거예요.

‘이 천 년 전에 예수님이 날 위해서 죽으셨대요. 그래서 나는 그거 믿고 지금 이 교회에 나와 앉아있답니다.‘ 그게 전설이지 뭐예요? 그러니까 그 고기를 추억하면 안 돼요. 그 양을 추억하면 안 된다니까요.

떡 그걸 그게 뭔지를 말씀으로 내가 받아 그 유월절 어린 양의 그 현실이 내 현실이 돼야 되는 거예요. 여기에서. 그래야 그 사람이 아들인 거라니까요. 근데 그 고기를 자꾸 달라 그러면, 그럼 너는 뭐냐는 거예요. 너는? 그래, 그 고기 줄게 그러면 그 양은 안 죽은 양이에요. 계속 죽어야 되니까. 그럼 그 사람에게서는 그 예수가 안 죽었다니까요. 그 희생 제사는 계속 드려져야 된다니까요.

그러면 죽지도 않은 예수를 믿고 어떻게 구원을 받냐고요?

그러한 매일 매일의 그 희생 제사 적 섬김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게 율법주의 이스라엘이었잖아요? 그들을 엘리야가 자기 몸을 사용하여 그림으로 한 번 보여줘요.

와상 17:1-7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아합은 유다의 왕입니다. 이스라엘 전체에게 고하는 거예요.]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그게 가뭄이에요, 그게 기갈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상태가 이거다! 라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요단 앞, 이게 파님 야르덴이거든요. 그러니까 야르덴이 요단인데 이게 야라드에서 나온 단어죠. 그러니까 풍성하게 흘러내리다, 그래서 율법에 보면 흐르는 물에 씻어야 정결해져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그 요단, 그 흐르는 물에 들어가, 그걸 건너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나아만도 흐르는 물, 요단에 들어가, 그 ‘흐르다‘ 그 말이 헬라어로 바꾸면 레마에요. 레오, 흐르는, 흐르다라는 뜻이란 말에요. 그게요. 그런데 어디에요? 요단 앞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게 파님, 그 흐르는 물, 진리의 나타난 것. 이 세상의 것으로 준 그 ’흐르는 것‘ 율법이죠? 그죠? 요단 앞]

- 그릿 시냇가 [라고 했어요. 이게 카라트라 그랬습니다. 카라트가 뭐라 그랬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 세 번째 제물로 갖고 와. 그거 취해, 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요렇게 똑 자른 걸 바타르라고 그랬죠? 그러면 하나님이 건너가 버려요. ‘아바르’ 그리고선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를 쭉 쪼개버리시는데 그게 카라트에요. 그게 그릿 시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지금 상태가 뭐냐 하면 열심히 제사 지내고 열심히 율법 지키고 있는데 하나님은 정작 그들의 경계 너머로 건너가 계신 거예요. 그래서 그릿 시내에요. 왜?

그들은 야라드 흐르는 물, 그 진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어야 되는데 파님 야라드, 율법으로 그 진리를 이해하고 열심히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엘리야가 그들의 대표로, 니들이 지금 그렇게 열심히 행하고 있는 그게 지금 물이, 비가 내리지 않는 기근의 상태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엘리야가 가서 요단 앞, 카라트에 가서 머물면서 무얼 받아먹느냐 하면 까마귀, 이 까마귀가 저녁, 에베르라는 단어하고 똑같은 단어에요, 모음만 다른. 저녁, 밤이 주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공중에 나는 까마귀를 봐라 그랬죠? 공중에 나는 새라고 그랬다가 그거 까마귀라 그랬잖아요? 근데 성경에서 공중에 나는 새는 항상 성전이잖아요?

그 성전은 저녁의 양식, 율법밖에 못 준다니까요. 그러니까 그 까마귀가 무얼 가지고 오냐면 고기 떡을 갖고 와요. 고기 떡. 그 고기를 저녁에 먹고 아침에 떡으로 먹어야 되는데 아침에도 고기 떡, 저녁에도 고기 떡이에요. 고기 양식.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죠? 거긴 망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릿 시내까지 완전히 말라버리고 엘리야가 경계를 넘어 이방으로 가는 거예요. 그랬더니 거기에 풍년이 있는 어떤 곳이 있죠? 기름도 떨어지지 않고 밀가루도 떨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나는 어떤 곳이 있어요. 유대 밖으로 건너갔더니. 그러니까 유대주의를 박살내고 있는 거예요. 지금요, 엘리야가. 그 까마귀, 오레브라는 그 단어가 그 에레브라는 단어하고 같은 문자로 돼있는데 사실은요 그 광야에 오렙 족속이라는 족속이 있었어요. 아니 족속 이름을 어떻게 까마귀라고 지었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어둡다 덮여있다, 이런 말이거든요. 그들이 엘리야에게 음식을 줬을 거예요. 까마귀가 물고 온 거 아니에요.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 오렙 족속이 엘리야를 먹인 그 이야기를 통하여 단어들을 이렇게 주시면서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 라고 메시지를 담아 주는 거라니까요. 아니, 요만한 까마귀가 뭐 얼마나 큰 걸 물고 왔겠어요? 그걸로 한 수 천 번 와야 아침 상 하나 되겠네. 그 까마귀는 아니겠죠, 그죠? 그러니까 그런 거예요.

고기를 먹고 애굽에서 나왔으면 이제 광야에서 하늘의 떡인 그 누룩 없는 떡, 무교병을 먹어야 된다, 라는 거예요. 유월절 어린 양의 살과 피로 애굽에서 나온 이들은 더 이상 그 유월절 어린 양을 추억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진리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고 그것으로 자기의 살과 피를 삼아야 되는 거예요. 그게 어린 양과의 연합이라는 겁니다. 나오긴 나왔는데 여전히 그 어린 양의 살과, 고기죠, 그게 살, 고기 똑같은 단어에요, 아싸르. 그 살만을 추억하고 그 공로만 치하하고 있으면 그게 광야에서 죽음의 고기 탐욕의 고기를 그리워하는 형국인 거예요. 그러니까 공로는 거기서 다 했으니까 우린 이제 막 살아도 되겠네, 이런 소리 하는 거예요. 그 고기만 그리워해. 그 살만 그리워해. 그리고는 그게 선이지, 그게 복음이지 이렇게 우기는 거예요. 그래서 나오는 거예요, 민수기서 11장 18절에. 애굽에서, 그것이 선이지. 토브지. 그걸 뭐 재미있다, 이렇게 번역을 해놨는데 그게 선이지! 이렇게 우긴다니까요.

아니요, 나왔으면 여기서 진리로 내가 그 진리의 말씀으로 되어짐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돼요. 그걸 연합이라고 한다니까요. 근데 나왔다고 우기는데 그 상태에서, 아니 노자나 석가나 이런 사람들도 그 율법으로부터는 자유로웠다니까요. 그래서 그런 진리 비스 무리한 것들을, 법에 묶이지 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거야, 라는 경전을 쓴 거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요. 그러면, 그게 다라면, 율법에서 풀려나는 게 다라면 아니 유교나 노자 장자의 그 도가사상이나 불교나 기독교나 뭐가 달라요? 전부 거기서 풀려나는 거라 메? 기독교는 그 진리로 되어짐이 있다니까요. 그래서 신약이 붙어 있는 거예요. 성경에만. 다른 경전은 전부 구약에서 끝난다니까요. 그러니까 뭐 건너가자, 건너가자 거기에 진리가 있다, 그러고 끝이에요. 모세에서 끝이에요, 다. 그 진리가 뭔지를 설명해주는 데가 없어. 신약이 붙어 있는 건 성경밖에 없어요.

우리는 이제 살아있는 제물,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져야 되는 거지 그 죽은 제물들을 자꾸 추억하면 안 돼요. 하나님이 그래서 성경을 통하여 너희는 이제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져야지, 라고 얘길 하신 거예요. 바울을 통해. 야, 이제 죽은 제물로 너희들이 살았으면 이제 내가 산 너희들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로 받을게. 근데 자꾸 그 제물만 얘기해? 살아있는 ‘나’를 갖다가 바쳐야 되는데. 열심히 뭐 희생봉사, 충성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내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라고 내가 그분에게 바쳐져야 된다니까. 자꾸 그냥 그 고기만, 그 유월절 어린 양만 추억하고 있는 거예요. 그건 전설이라니까요, 그건요.

그래서 주님이 당신의 살과 피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것이 바로 떡인 거야, 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거 고기잖아요? 살과 피는 고기. 그 고기는 떡이지, 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리고는 거기서 한 발 더 가십니다. 한 번 보세요.

요 6:55-63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여기 참된 양식, 참된 음료가 진리양식, 진리음료 이런 말이에요 알레또스니까]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도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 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어렵죠, 그죠? 여러분도 어렵죠? 차라리 그냥 성찬식 열심히 하면 그게 살과 피가 된다고 그러면 그냥 어떻게 먹어보겠는데 배가 터지도록. 근데 그게 아니라니까 어렵죠]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왜? 그들은 여전히 육의 것밖에 모르니까 살과 피 얘기하니까 저 살을 어떻게 뜯어먹어야 되는 거야? 이러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얘들아, 니들이 지금 그 살과 그 피를 이야기하고 있으면 그럼 내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이 육신을 갖고 올라가버리면 니네 뭐 뜯어먹을 거야?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거 아니잖아? 그게 -]

62 그러면 인자가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그럼 뭐 뜯어먹을래? 내 얘기가 그 얘기냐? 물어보는 거죠.]

63 살리는 것은[ 내가 지금 살과 피 이야기했지? 그리고 그걸 떡이라고 했다. 내 말이 그 영, 그걸 영적으로 얘기한 거지 누가 이 살과 피 얘기하는 거니? 그러면 유월절 그 양고기, 그 살과 피도 영적으로 이해를 해야 되겠네요? 그러니 보세요]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내 말을 진리로 받아들여, 그럼 그게 내 살과 피야. 누가 나 뜯어먹으래냐? 누가 날 떡으로 먹으래? 나를 믿으면 된다는 거예요. 내가 무슨 내용을 담고 왔는지 그걸 진리로 이해하면 된다, 라는 거예요. 말이 영이야, 말씀이 영이야! 그러는 거죠. 그럼 그 말씀이 떡이라는 거죠? 그 말씀이 고기라는 거죠? 그럼 그 말씀을 지금 여러분이 듣고 있고 그걸 마음으로 가져 이해하고 있잖아요? 여러분이 그 떡을 먹는 거라니까요. 그리고는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세요, 또 들려주세요, 가 뭐예요? 일용할 양식을 주세요! 기도하는 거예요 그게.

그래서 주님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고 주린 배를 채우라는 마귀의 시험을 받아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거예요.

마 4:1-4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자, 광야에는, 크로노스의 광야죠? 먹을 게 없어야 돼요. 주려야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뭘 아는 곳이에요? 아, 그 말씀 이외에는 우리를 이 주림에서 해결해낼 수 있는 게 없구나,를 배우는 곳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그 이스라엘의 사십 년의 모형으로 사십 일을 어떻게 하셔야 돼요? 사십 년 동안 굶을 수 없으니까. 굶어야 돼요. 금식하셔야 된다니까요. 왜? 예수님은 갖고 있어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나는 너희들이 모르는 양식을 갖고 있어, 라고 요한복음 4장에서 말씀하셨잖아요. 주님은 갖고 있는데 세상에는 없는 그 양식. 세상에는 그 양식은 없다,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광야에서는 금식하셔야 된다니까. 그래서 금식을 하세요. 주린 자로 사신다니까요. 그 때 마귀가 뭐라 그래요?]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주린 자는 복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건 진리죠? 예수님은 구약에서 메시아는 항상 돌로 표시했습니다. 그러죠? 산돌, 모퉁이돌, 흰돌. 돌이 떡이 되어 우리에게 먹히는 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잖아요?]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무슨 말이에요, 이게? 우리 분명히 신명기 8장에서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아들들, 장자들, 이스라엘을 주리게 하셨다 그랬습니다. 이유는 뭐라 그랬어요? 조금 아까 읽었잖아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거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주리게 하셨다, 그랬잖아요? 그럼 예수님도 당연히 그 광야에서 주리셨어요. 그럼 하나님이 주리게 하신 거죠? 그리고는 예수님 혼자 정답을 내놓으시는 거죠. 사람은 떡으로 사는 거 아냐. 그 떡을 유월절 고기를 그 만나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해서 네 마음의 양식으로 갖는 거지. 거기까지 가라는 거예요. 그런데 유월절 고기, 광야의 만나, 거기서 머물러 버리면? 야, 하나님이 나를 살리기 위해서 이런 걸 주셨대. 거기서 그냥 칭송하고 끝나버리면? 그건 내 거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주님이 그러는 거예요. 굶으신 다음에 광야에서. 나를 배불리게 하는 건 그 돌도 아니고, 돌은 우리에게 처음으로 하나님이 말씀이 내려올 때 돌비에 쓰여져서 내려왔잖아요. 그 말씀은 예수고. 그러니까 예수가 돌이죠? 돌이 떡이 돼야 되는데 그 떡은 말씀으로 끝나야 되는 거예요. 완성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 예수는. 예수는 아는 거예요. 그래 우리를 살리는 건 그 말씀이지, 그 진리지, 그 하나님이지, 그 사랑이지. 정확히 대답하시는 거죠.

그러니까 고기, 살은 떡으로 떡은 진리의 말씀으로 또 그 고기의 피는? 물로. 물은 성령으로. 이렇게 완성이 돼야 되는 거예요. 어느 중간에 멈춰버리면 안 된다니까요. 아니, 요한 일서에 나오잖아요? 물과 피와 성령은 셋인데 그건 하나다, 그러잖아요? 요한이. 그러니까 성령으로 이해되어지지 않으면 물과 피는 오히려 여러분을 죽이는 것이 될 수도 있다니까요.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 나타난 형상으로 오신 예수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 사건들을 기록한 성경과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라는 진리를 가지면 되는 거예요. 그분의 주권, 그분의 능력 그걸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나는 낫띵[ Nothing] 이거. 그리고 그것을 마음으로 전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아래의 것, 아래의 소리, 아래의 글, 아래의 몸 짓으로 위의 것을 전하게 되죠? 어떻게 전할 거예요? 마음으로 마음을. 다운로드 해줄 거예요? 뭐 어떻게? 아래 걸로 전해야 돼요. 그런데 그걸 그 위의 것으로 받아들여요. 어떻게? 성령이 그거 하시는 거예요.

마 14:15-20

저녁이 되매 [저녁이에요, 저녁이 되면 먹을 게 없는 곳입니다. 그죠?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들이요 [광야에요, 에레모스]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먹을 게 없는 거죠? 먹을 게 없는 곳이 광야니까.]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양식을 주어라, 그래요]

17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 이니이다 [거기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 모아서 내놓은 게 그거였어요. 보리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보리 떡 다섯 개, 보리 떡은 간음한 여자가 제물로 드리는 거였고 그래서 짐승밖에 안 먹었어요. 물고기는 란 태생의 대표죠? 부정한 것들이에요. 그리고 다섯과 둘은 뭐예요? 계명이죠. 십계명을 하나님이 다섯, 다섯으로 나눠주죠? 그걸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둘로 주잖아요. 자, 계명, 부정한 것. 계명이 아래의 것으로 그냥 우리에게 주어지면 그건 죄에요. 부정한 것이란 말에요. 근데 인간들이 광야에서 내놓을 수 있는 거, 다 합심해서 내놨더니 그거밖에 없어. 이걸로 배부르겠다는 거죠? 인간들이 인류의 역사가 크로노스가 내놓을 수 있는 생산물은 그거밖에 없다니까요. 내놨는데 주님이 어떻게 하세요?

18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작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축사하시다, 율로게오가 뭐냐 하면 유, 좋은, 선한, 이런 말이에요. 그리고 로게오가 로고스에요. 하나님이 축하셨다, 라는 건 그 율법을 오병이어를, 그 부정한 것을 하나님이 선한 로고스, 말씀으로 덮어버리자, 이걸 축사라고 번역했어요, 율로게오. 그게 그들의 양식이 되더라는 거예요. 그랬더니 그들이 광야에서 배불리 먹네요, 그죠? 여러분이 이걸 잘 알아두셔야 되는데.

그런 성경에 나오는 숫자들이요 괜히 막 쓴 게 아니에요.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의 언약이 7로 주어지죠? 예? 이게 약속의 수입니다. 칠[7]입니다. 이게 뭐냐 면은 하늘의 삼이[3] 땅의 사[4], 땅의 숫자가 4니까, 사 여기에서 이루어지면 이 둘을 합해서 완성, 안식 칠[7]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의 수라고 해요. 이 언약, 이거는 우리가 잘 모르니까 하나님이 이 땅의 어떤 걸로 가르쳐줘야 되죠? 그러면? 그거는 계명으로 출애굽기에서 십[10]계명으로 주죠? 이거를, 이 계명을 이 언약 [7]으로 잘 이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이해하게 되면 그들을 아들 [12]이라 그래요. 그러면 이 아들이 된 이 사람들은[12] 이 10을 갖고 7이 된 자들이네요. 그죠?

70 [10으로 7일 됨] 이들을 하나 [1] 라고 해요. 모노게네스, 독생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물이 없었을 때 하나님이 마라의 쓴 물을 십자가 [나무]를 던져서 단물로 만들어주고 엘림으로 왔는데 거기에 12개의 우물과 70개의 종려나무가 있죠?

이게 기둥, 언약이란 뜻이에요. 둘 다. 말씀. 괜히 뭐 나무가 70, 그러고 누가 세어 가지고 거기에다 적어놓고 그런 거 아니란 말입니다 거기에 숫자가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말씀을 전하러 보내시는데 70으로 보내죠? 70명이라고 안 돼 있어요. 70으로 보냈다고 그럽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가 계명을 받아서 나중에 이것을 이들을 [12] 가르치는 자로 70장로가 서죠? 이게 다 그냥 그런 숫자란 말에요. 하나님의 진리가 이렇게 되면 이 70은 이 하나[1]로 간다니까요. 그래서 12사도 다음에 7집사가 오는 거예요. 집사라는 디콘이라는 단어 자체가 섬김이라고 그러거든요. 이 섬김은? 성경에 나오는 섬김은 말씀으로 섬기는 것밖에 없어요. 구제, 뭐 그런 것들도 다 말씀으로 구제하는 거지 무슨 뭐 돈으로 뭐 사람들 양식 사가지고 구제하고 이런 거는 성경에 나오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12이 된 그들은 반드시 말씀으로 섬기는 자 [7]가 되어야 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장로가 [12] 되면 반드시 집사의 역할 [7]을 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에서 존 칼빈이 집사, 장로, 목사, 원로목사 무슨 총회장 뭐 이렇게 만들어놓은 건 그건 그냥 정치라고 보면 돼요. 그러니까 그런 거에 묶이지 마세요. 장로가 뭔데 뭐 몇 천만 원씩 내고 그거를 받고 뭐 권사가 뭔데 그걸 또 몇 백만 원씩, 그것도 가격이 딱딱 정해져있어. ㅎㅎㅎ. 아니 면죄부 팔던 종교개혁 이전하고 지금하고 뭐가 달라요? 면죄부는 나쁘다고 하니까 고거만 안 파는 거지 지금. 안 팔긴 또 뭘 안 팔어? 안수기도 막 팔고 그러잖아요? 종교개혁 이전으로 다시 돌아갔다니까요. 근데 무슨 개혁주의에요? 이게? 개혁주의 아니지.

자, 그렇게 우리는 광야에서 말씀을 먹고 배불러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에요. 우린 그거 구하는 거예요. 그렇게 율법을 갖고 위의 것을 깨달아 아는 거죠. 그래서 성경이 그걸 10을 갖고 위의 것 하나로 깨달아 알면 그걸 10의 하나라고 그래요. 그걸 개역성경이 십일조라고 번역을 한 거죠. 십으로[10], 계명으로 하나가 되어라, 이런 말이에요. 그러면 그거 내가 받아. 이런 말이에요. 여러분이 번 거의 십 분의 일을 하나님이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알아서 잘 쓰세요. 헌금을 하던지 뭘 하던지. 그게 아니에요. 그리고 십 분의 구는 내꺼,이게 아니라 십으로 네가 하나가 되면 너를 내가 받을게 이런 말이에요. 그게 모노게네스잖아요. 하나만 가진 자. 마음으로 가진 자. 진리를 가진 자. 그럼 그가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거죠.

자 보세요,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다섯, 둘 그리고 그걸로 배부른 하나를 가진 어떤 자. 이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이야기가 오병이어의 이야기와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들 이 내가 만나를, 이 양식을, 하늘의 떡을 비같이 내려줄테니까 한 오멜씩 받아, 거두어 가. 이렇게 이야기 한 거예요. 한 오멜이란 게 십일조라는 말이에요. 너희들 내가 양식을 하늘의 양식으로 말씀을 던질 테니까 그걸로 하나가 돼,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만나는 한 호멜만 가지고 가야 돼요. 그게 에바 십 분의 일이라고 그러죠? 그게 십으로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양식을 그렇게 안 받으면 안 된다니까요.

출 16:15-16, 36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이게 ‘만나’ 라는 말이에요.모르면 안 된다니까요. 모르고 먹으면.]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 할지니라 하셨느니라

36 오멜은 에바 십 분의 일이더라.

십으로 줄 테니 하나로 받아라, 이 말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하늘에서 내려온 그 떡은 모세가 주는 떡. 모세가 주는 떡이 뭐예요? 율법이란 말에요. 모세의 떡은 그거 아니지,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요 6:26-3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러면 안 된다고 했죠? 주린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떡으로 먹고 여기서 배부르면 안 돼요.]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여기서 썩는 양식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호 브러시스 호 아플로미’ 는 멸망하게 만드는 양식이라는 뜻이에요.]

- 너희는 멸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 하라고 해놓고]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니들이 애써서 거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는 거래요.]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믿는 게 하나님의 일이야, 아, 믿으라니까! 그러는 거예요. 믿어. 나를 말씀으로 가져야지 그게 믿는 거죠?]

3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그걸 율법으로 준 거니? 이런 말이에요. 모세가 준 거 아니지.]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알레떼이아 떡, 아르토스, 진리의 떡이지 그건. 이렇게 얘기했어요. 모세가 준 거 아니지.] 너희에게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그래 줄게]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 [이야 근데 뭐 어떻게 하래요? 나를 믿음으로 가져, 그러잖아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게 떡이야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이렇게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은 진리의 양식이에요. 그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것을 받은 이들이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를 가진 자들이고 그들의 이름은 이미 거룩해진 것이고 그들은 푸토코스의 존재가 되어서 그 하늘의 양식을 갈망하는 삶을 살게 되는 거죠. 주린 자로 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배고픔 속에서 풍요에 거하게 되는, 여기서 모든 존재들이 배고픈 상태죠? 근데 그걸 아는 이들이 바로, 아까 그랬잖아요. 주님이, 그게 부요한 거야. 그게 배부른 거야 그랬죠? 그걸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한 번 보세요. 마지막으로.

빌 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게 아냐. 내가 가난하고 먹을 게 없어서 얘기하는 게 아니다. 나는 스스로 배부르는 방법을 배웠어.]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화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 땅의 그 굶주림, 그 배고픔 안에서 어떤 게 풍요라는 걸 내가 알았단 뜻이에요. 아, 나는 먹을 거 없어도 괜찮고 부자로도 잘 살 수 있어, 그냥 겸손하게, 이런 말이 아니라니까요. 성경은 그런 배고픔 그런 부유함에 대해 한 줄도 기록하고 있지 않아요. 이 땅에서의 그 말씀이 없는 그 상태의 굶주림, 그것도 내가 알았고 그걸 아니까 어떤 게 풍요인지 내가 알게 되었어, 이런 말이에요. 그게 풍요에도 처하고 비천에도 처한다, 그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되셔야죠. 그렇게 되니까 자기가 바리새인으로 율법주의의 아주 그냥 대표요 선두주자로 열심히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 라고 하는 거예요. 아, 이게 배부르게 하는 거 아니구나! 이게 인간의 가치를 결정짓는 게 아니구나! 하고 알은 거예요. 그래서 아, 난 배고픈 자가 맞구나 굶주린 자가 맞구나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배불러야 되는 거구나! 그래서 굶주림 속에서 풍요를 안자가 되었다고 얘기를 하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은 배고프셔야 되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다음 주에 조금 더 부연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모든 인간들이 이 세상의 굶주림을, 공허를 결핍을 이 세상 것들로 해결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이런 가운데에

그 속에서 아니야, 우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배부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굶주린 우리의 실존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렇게 진리를 뿌려주셔서 우리는 진짜 주린 자가 맞고 우리를 배부르게 할 수 있는 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안만큼 하나님 나에게 바로 그 내일의 양식 그 양식만을 나에게 퍼부어주옵소서, 라는 기도를 더욱더 열심히 할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