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성수 목사/산상수훈

41. 하늘 양식이 우리 안에서 만들어 내는 것, 용서

Hebrew 2023. 5. 20. 22:27

산상수훈 41번 말씀

제목 ; 하늘 양식이 우리 안에서 만들어 내는 것, 용서

본문 : 마 6 ; 12-13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제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들을 공부할 차례입니다. 이 내용들은 전부 앞에서 말한 하늘 양식인 그 셋이라는 떡, 그 셋이라는 떡이 무엇인지 이제 충분히 이해가 가시죠? 셋이라는 그 떡을 갖게 되었을 때 성도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그런 현상들과 또 이루어지게 되는,성취되는 그런 현실들을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용서에 관한 내용만을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집에 가서 빨리 개표방송 보시라고.ㅎㅎㅎ. 아, 관심이 없어요, 그런 데에. 저도 투표했어요. 오바마. 미국시민이라.

우리가 앞서 공부한 바에 의하면 주님은 모든 율법을 살인하지 마, 간음하지 마, 거짓증거하지 마의 그 셋으로 축약을 해서 설명을 해주신 후에 그 모든 것을 올바로 이해를 해서 마음으로 간직하고 그것을 이웃에게 이렇게 흘려 줄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아가페다, 라고 말씀하셨죠? 그게 사랑이야! 에스카톨로스 코드란테스, 그 넷의 마지막, 그 4분의 1, 우리가 해야 할 것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했잖아요? 그죠? 그리고 셋으로 완성이 된 자들이 넷의 존재, 그 사랑을 하는 그런 존재로 살게 된다고 하셨죠? 그러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 완전이다. 텔레이오스다! 라고 이렇게 말씀해주셨어요. 그래서 5장 마지막을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해야 된다, 그런데 어떻게 온전해져야 되느냐? 그걸, 모든 율법을 사랑, 그러니까 넷으로 그렇게 이해하여 마음으로 가지면 그걸 온전이라고 해줄게. 이렇게 이야기했단 말에요. 하나님의 어떤 뭐 도덕적 속성 뭐 이런 것들을 닮아가는 게 온전 아니란 말입니다. 온전에 비스무리가 아니에요, 그냥 온전해라! 그랬다니까요. 닮아가라고 그러지 않고.

자, 그리고는 그러한 성도의 역사 속 현실, 그것을 이게 프로슈코마이, 기도라는 것을 이제 예로 들어서 다시 풀어주는 거예요. 그게 주.기.도.문입니다. 그러니까 5장 앞의 그거, 그 내용들을 이렇게 떡으로 너희들이 갖게 되면 이렇게 흘려주게 될 거야. 그리고 너희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실, 성취되는 그런 현실은 이런 거야, 라고 설명해주는 게 주기도문이에요. 그리고 그걸 통틀어 그냥 기도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기도는 성경이 말하는,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기도는 사실은 아닌 거죠.

성도는 그 사랑으로 완성이 되는 말씀을 양식으로 받아서 그 하늘들 안에 아버지를 모신 자가 되는 것이며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되는 거죠? 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들, 그러니까 호 우라노스, 우리가 하늘들이 되면 그 안에 그 진리라는 아버지가 계신 것이고 그 아버지가 우리를 아들로 낳는 거잖아요? 그죠? 그래서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라고 인제 이야기를 하는 거고 그리고 그것이 그 이름이 그 말씀이 거룩하게 되는 거죠? 그건 다른 말로 그 말씀으로 깨끗하게 해주세요, 라는 거죠? 그건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현실이죠. 그 말씀 그 진리로 우리는 깨끗한 자, 그게 하기오스, 성도라는 단어가 그 뜻이거든요.

그 깨끗한 자, 거룩한 자가 이미 됐단 말이죠. 그리고 그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섬김’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으로 섬기잖아요? 그 섬김을 받는 나라가 되는 거거든요. 내가. 그 바실레이아가 섬기다, 란 뜻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으로 날 섬겨주면 내가 나라가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늘의 뜻이 땅인, 흙인 나에게서 이루어지는 거란 말에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한 영의 양식으로 받아먹게 되면 우리에게서 일어나게 되는 그런 현상과 이루어지게 되는 현실이 이제 오늘 본문의 이야기들입니다. 하여튼 다 같은 이야기에요, 그냥.

본문 12절을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는 청원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늘의 양식을 올바로 받아먹게 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용서라는 현상이라는 이야기에요. 용서! 그게 구원의 핵심 아닙니까? 용서. 그런데 이 구절을 원문으로 보면요 ‘죄’ 라는 단어가 하마르티아가 아니라 오펠레토스라는 단어로 쓰였어요. 신약성경에서 죄라는 단어는 거의 하마르티아로 기록이 돼있습니다. 그 단어의 의미는 과녁을 벗어나다, 제 짝이 아니다, 라고 했죠? 그 단어 자체가 과녁을 벗어나다는 뜻도 있지만 ‘하’ 라는 부정접두어에다가 ‘메로스’, 메로스가 그 창세기로 가면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고 했을 때 그 ‘제라’ 라는 단어가 갈비뼈가 아니라 부분이에요. 반쪽. 이런 뜻이거든요. 그것이 메로스라는 단언데 ‘하’ 하고 ‘메로스’에요. 그러니까 그 짝이 아니다. 그러면 죄에요, 그것이. 그 단어가 하마르티아거든요. 그러니까 내 짝을, 내 남편을 엉뚱한 것으로 붙들어서 나하고 붙여버리면 그게 죄에요. 하마르티아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엉뚱한 대상, 그 대상을 내 남편으로 붙들어버리면 거기에서 발생되는 엉뚱한 열심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지 않고 율법으로 받아버리면 그래서 그걸 내 남편으로 삼아버리면 그 율법은 나를 열심히 어떤 행위를 하게 독려를 해준다니까요. 그리고 독려뿐만이 아니라 협박한단 말에요. 그러면 그렇게 그 남편에 의해 강요된 행위를 내가 하게 되면 그 모든 것들을 다 죄라 그래요. 그게 하마르티아라는 단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하마르티아는 하나님이 아닌 그 다른 대상, 내 짝, 진짜 짝이 아닌 다른 짝. 그걸 내게 붙여서 그걸 숭배하는 것이거나 거기에서 발생되는 엉뚱한 과녁을 향하는 그런 열심, 이런 걸 죄라 그래요. 그러니까 그것이 세상에 속해있는 그런 상태에 대한 인간실존의 현주소, 이게 하마르티아에요. 죄란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을 설명해주시기 위해 우리의 인식 수준에 맞는 아래의 것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있죠? 그 호 코스모스 세상 아래의 모든 것이 다 그거란 말에요. 그걸 그냥 표피 그대로 인식을 함으로 해서 잘못된 짝으로 그걸 취해버리거나 그 표피적 말씀을 몸으로 열심히 행해버리면 그걸 죄라 그런단 말에요.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죄는 그것만이 아니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죄는 그것과는 다른 죄에요. 말씀드렸다시피 오늘 본문의 죄는 하마르티아가 아니라 오펠레마타. 오펠레마타라고 기록돼 있는데 그 단어는 그냥 빚이에요, 빚. 채무자가 진 빚 있죠? 빚, 그 빚. 그 빚이라는 의미와 함께 마땅히 해야 할 의무라는 뜻도 있어요. 마땅히 갚아야 할 빚을 갚지 않거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죄라는 거예요. 갑자기 율법으로 돌아가는 거 같죠? 설마 그런 얘기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마땅히 해야 할 어떤 일은 그런 율법적인 행위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아무튼 이 신약성경이 쓰여질 당시의 사회문화적 관습을 고찰해보면 당시의 유대인들은 일 하지 않는 것,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행하지 않는 것을 죄의 범주에 넣었던 것은 분명해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일 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아라, 라고 이야기한 것이 일 하지 않는 자는 못 먹는 자다, 라는 뜻이에요. 주님은 지금 그 문제 그 오펠레마타의 문제를 해결,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도가 지니고 있는 그 빚, 그걸 죄라고 지금 여기서 하니까. 다른 데서는 빚이라고 그렇게 번역을 하거든요. 근데 여기서는 굳이 죄라고 했단 말에요. 근데 둘 다 같은 뜻이에요. 그걸 먼저 확인해야 되겠죠? 그 빚, 그것을 갚지 않고 그것에 대한 의무를 행하지 않으면 죄라 그러니까 반드시 그것이 무언지 먼저 규명하고 가야 된단 말에요.

롬 1:13-15

형제들아 내가 여러분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고건법이죠? 반드시 알기를 원한다, 이런 뜻이에요] -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요게 같은 단어에요. 빚진 자라. 바울이 자기를 빚진 자라 그래요. 그럼 바꾸어 말하면? 내가 만약에 이거 갚지 않으면 너희들에게 죄인이다, 이런 말이에요]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답이 나왔습니다. 그죠? 바울이 빚진 자로서 갚아야 할 빚이 뭐라는 거예요? 복음 전하는 거라는 거죠. 오펠레테스. 바울은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15절에서 그 빚이 복음의 빚이라고 분명히 밝혀줘요. 그러니까 성도는 반드시 복음의 빚을 갚는 자로 살게 되어 있다, 라는 그런 말이에요.

오늘 본문에 그 ‘사하여 주옵시고’, 그 아페스도. 앞의 동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제가 과거명령형이에요. 그건 우리에게 반드시 완성이 될 수밖에 없는 어떤 것, 아니 이미 완성된 그것을 청유하는 거라 그랬죠? 그게 과거명령형 시제라 그랬잖아요.

따라서 성도는 반드시 빚을 갚아 용서를 전해주는 삶을 살아야 되는 거예요. 아니, 살게 되어 있다는 그런 말입니다. 자, 그게 무슨 말인지 제가 차근차근 설명해드릴 게요.

바울은 진리를 전해 받아서 그것을 마음으로 받은 자신을 빚진 자라고 표현을 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요즘 공부하고 있는 로마서 8장에서는 이렇게도 말을 합니다.

롬 8: 1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마찬가지에요, 같은 단업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잘 보세요.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다. 그러면 당연히 빚을 갚아야 되는데 육신으로 빚을 갚으면 너희는 반드시 죽는다. 이런 말이에요. 육신으로 빚을 갚으면 너희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니 영으로 그 육신의 빚 갚음 그것을 죽여라. 이런 말이에요. 근데 영은 푸뉴마, 올바른 말. 깨끗한 말. 진리의 말씀을 가리키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그냥 너무 쉽게 간과해버리는 거 같아요.

선악구조 속의 아담들은요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 스스로의 자원과 열심과 애씀과 노력으로 자신들의 몸을 활활 태우는 삶을 살게 되죠. 그런데 주님은 뭐라 그러느냐 하면 너희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꽝이다, 이렇게 얘기했단 말에요. 그런데 모든 인간이 자기의 그 빚, 구원을 얻어내기 위해 자기의 몸을 활활 태워요. 이게 빚 갚는 거예요. 모든 인간들이. 안 그러면 불안해서 죽죠.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자신들의 빚을 갚으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어 있어요. 아니, 인간은 그거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그게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보편적 아담들의 속성입니다.

그렇게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은 율법에 빚을 진 자로 평생을 살게 돼요. 그래서 기부로, 선행으로, 선교로 인격의 도야로 자신의 빚을 갚아나가요. 이걸 다 갚으면 구원에 이르겠지? 라는 막연한 추측을 갖고. 그리고는 그러한 것들이 조금씩 눈에 보이게 성숙한 모습으로 발전이 되고 또 주위 사람들로부터 괜찮은 평가를 받게 되면 마치 채무자의 빚이 조금씩 탕감되어 가듯 좋아해요. 이 빚을 안 져본 사람은 몰라요. 그 기분이 어떤지. 그렇게 모든 인간들이 빚쟁이처럼 살아요. 그게 율법주의의 세상이에요. 거기에서는 끊임없는 섬김 빚 갚기의 행위만 난무하죠.

근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이 빚을 갚겠다고 내려오셨어요. 땅으로. 모든 인간들이 자기들의 빚을 갚겠다고 열심히 채무자의 삶을 살고 있는데 채권자인줄 알았던 그 신이, 그분에게 우리는 모든 인간은 빚을 갚아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채권자에게 열심히 빚을 갚고 있었는데 채권자가 내려오더니 내가 채무자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너희들에게 빚을 갚아야지 니들이 나에게 빚을 갚으면 그거는 진리가 아니다, 라고 이야기를 했단 말입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내가 섬기러 왔다, 라고 이야기했단 말에요. 근데 왜 자꾸 니들이 나를 섬겨? 내가 니들을 섬기는 게 하나님 나라야! 그랬단 말에요. 내가 너희들에게 빚을 갚는 게 하나님 나라의 통치 방법이야. 하나님 나라는 너희들이 열심히 일해서 나에게 빚을 갚음으로 말미암아 운영되고 통치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에게 쏟아부어주는 그런 곳이 하나님 나라다, 라는 거예요.

그리고는 당신에게 구하라고 하세요. 그 단어가 아이테오라고 했죠? 그 단어는 빚을 갚으세요, 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구하라, 라는 건 뭐예요? 내가 채무자다, 라는 거예요. 구하라, 라고 시킨 건. 그러면 내가 갚으리라 그랬단 말에요.

인간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우주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이 땅의 아담들은 피조물이 신에게 빚을 갚은 것이 마땅하고 올바른 신앙의 행위라고 철석 같이 믿고 행해왔어요. 그래서 모든 종교들이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분은 섬김의 대상, 두려움의 대상. 그거 안 갚으면 나에게 해코지할지도 모르는 그런 분. 모든 종교의 신이 다 그렇죠 뭐. 그런데 신이 내려오시더니 내가 너희에게 빚을 갚은 것이 진리이거늘 왜 너희가 나에게 빚을 갚으려고 해. 그게 교만이다. 휘브리스. 니들이 니들의 자리를 모르고 니들 자리를 떠난 거야. 이렇게 이야기를 한단 말에요. 그걸 휘브리스라 그래요, 성경이. 그걸 교만이라고 번역했다니까요. 니들이 아무리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어내서 나에게 바친다할지라도 니들이 심지어 예수와 방불한 자처럼 성숙해서 내 앞에 온다할지라도 이 세상 것은 내가 안 받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대노하셨어요. 이 독사새끼들아! 욕을 하시면서.

당연히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아담들의 속성은 그 신에게 빚을 갚고 섬기는 건데 하나님이 내려오더니 우리에게 빚을 갚는다네? 그게 은혜잖아요? 그러니까 그 은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니까요.

근데 이 역사 속 아담들 중에 그 말의 뜻을 알아먹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오순절 이후부터, 그죠? 오십[50] 이후부터.

희년이죠. 우린 하나님께 드려서 갚을 수 있는 그런 채무변제의 능력이 전혀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들이 이제 나타나기 시작한 거예요. 아, 이걸로는 빚을 갚을 수가 없는 거구나! 이렇게.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약속하신 그 생명의 말씀을 받아먹고 살아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이 주마하셨던 그 약속의 생명을 마치 채권자들처럼 거저 받아먹기 시작했단 말에요. 준다고 했으니 주세요, 하고 아이테오 하니까 그분이 주셨다니까요. 진짜로 빚을 갚아주셨단 말이에요. 그게 약속 아닙니까? 내가 원하기도 전에 그분이 주마, 하고 약속하신 그걸 나에게 주면 그분이 나에게 빚을 갚는 거예요. 먼저 준다고 그랬으니까.

그게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었어요. 그 양식을 잘 받아먹고 나니까 진리의 말씀을 복음으로 받아먹고 나니까 그동안 자기가 갚아야만 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그 율법의 빚이 하나, 하나 탕감되어 나가기 시작했어요. 어, 이것도 아니네? 이것도 나에게 갚으라고 한 게 아니었네? 이 제사도 아니었네? 이 안식일 지킴도 아니었네? 이렇게. 하나, 하나 탕감이 되기 시작한단 말입니다.

내가 갚아야 할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쏟아부어주시는 당신의 그 약속, 그 빚을 내가 받아야 살 수 있는 것이다, 라는 진정한 자유가 그들에게 퍼부어진 거예요. 그것이 바울이 로마서 8장 12절 이하에서 말하고 있는 영으로써, 그 진리의 말씀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 이에요. 그렇게 되면 그 영의 말씀에 의해 내 빚이 이제 모두 갚아지는 결과가 나타나겠죠? 물론 율법의 빚이요. 내가 이거 안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벌을 내릴지도 몰라, 나를 죽일지도 몰라, 해코지할지도 몰라, 라고 열심히 행했던 그 율법의 빚.이것이 진리의 말씀이 내게 들어오자 어, 아니네? 하나님이 나에게 그걸 요구하신 게 아니었구나! 라고 하나, 하나 알게 되면 나중에는 완전히 탕감될 거 아니에요? 그걸 용서라고 한다니까요.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내가 빚을 탕감해줘야 하는, 바울이 자기보고 빚진 자라고 했잖아요? 그럼 내가 빚진 자에요. 그러면 내가 누군가에게 빚을 갚아 그 빚을 탕감해줘야 되는데 일차적으로 내가 빚을 갚아 탕감해줘야 할 대상이 누구에요? 납니다, 나. 내가 생명의 진리를 양식으로 갖게 되면 ‘나’ 가 제일 먼저 그 빚을 탕감 받아요. 그래서 오늘 본문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인거예요. 이 문장을 헬라어 원어로 다시 직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우리 안 에서에요. 자유롭게 하는 용서가 일어나게 해주세요. 우리 안에서. 우리의 그 죄들을”

다시, 우리의 그 죄들을 당신이 사하여, 용서하셔서 우리 안에서 자유가 일어나게 해주세요. 이런 말이에요. 그리고 역시 우리가 우리를 용서합니다. 카이로 연결돼 있거든요. 우리가 우리를 용서합니다. 우리의 그 죄들을. 이런 말이에요.

이 문장을 아람어로 보면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합니다’ 라는 그 어구가 완료시제로 기록이 돼 있어요. 아람어에서 완료형은 동시적인 것을 가리키는 거거든요. 예수님이 아람어로 말씀하셨을 거 아네요? 그죠? 그러니까 그리로 가서 확인을 해보면 금방 안단 말에요. 따라서 이 구절은 이걸 먼저 할 테니까 저것을 해주세요, 라는 이런 순서적 청원이 아니라 앞의 것과 뒤의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얘기에요. 그래서 완료형으로 기록이 돼 있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빚을 갚으셔서 나의 빚이 탕감이 되면 나는 나를 용서하고 있고, 용서할 수 있고 나의 죄에서도 완전히 자유롭게 풀려날 수 있다, 라는 그런 말이에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셨나요? 그게 구원받은 자의 현실입니다.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게 되면 제일 먼저 용서를 해야 하는 존재가 나란 말에요. ‘나’. 그래서 그가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는 그 자유를 갖고 다른 이들에게 그걸 쏟아 부어, 흘려주어 그 용서를 그들에게 전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마치 내가 그를 용서하는 것처럼 성경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니까요. 나는 단지 나를 용서한 그 말씀을 흘려준 거뿐인데. 그러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을 용서하잖아요? 정말 그 어디나 하늘나라에요. 늘 행복하고 기쁘고 뭐 그렇단 말이 아니라. 그건 미친놈이고. 그 자유로 산단 말에요. 그 율법의 빚에서 풀려난 자로 살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지옥에 보낸다할지라도 거기서 그 자유로 산다니까요. 거길 천국이라 그래요.

유치하게 그냥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게 다 구비되어 있는 그런 것을 천국이라고 생각하시면 여러분은 아직도 하나님 말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들이에요. 세상을 섬기는 거예요, 그것이요. 그런 것과는 아무상관 없어요. 물론 좋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좋음이 아니라니까요. 상상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하늘을 텅 비어놓은 거라니까요. 니들이 상상하는 그런 하늘 아니다,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보편적 인간들이 이 율법의 빚을 갚기 위해서 일평생 그 짐을 지고 수고와 환란 속에서 사는 빚쟁이들이라면 성도는 하나님의 그 빚 갚기의 섬김, 그러니까 아가페, 사랑이라 그러죠? 그 하나님의 빚 갚기. 그 섬김, 그 사랑에 의해서 자신의 빚을 탕감 받고, 다른 말로 자신의 빚을 스스로 탕감해주고. 자유롭게 풀려난단 말에요. 뭐 일 년에 무슨 맥추 감사절, 추수 감사절 이건 성경에 있지도 않은 것들, 뭐 성탄절 부활절 이럴 때마다 이거 목돈해서 바쳐야 되는 거 아니에요? 교회의 대목 아니에요? 그러니까 없는 것들을 자꾸 만들어내는 거예요, 교회에서. 교회에서 그거 없으면 큰 교회들은 재정이 왕창 흔들리게 됩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런 거, 원래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줬잖아요? 제가.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적어도 그런 데서 풀려났죠? 그렇게 풀려나는 거예요. 하나, 하나.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다 하고 있으면 그거 안하면 되게 불안하다니까요. 혹시 나만? 하나님이 나만 미워하시면 어떡하지? 뭐 이렇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런 거 없어요. 아니, 하나님이 절기 월삭 이런 거 가지고 아직까지도 너란 놈들은 전부 저주받은 놈들이다, 그랬는데 그거는 다 찢어버린 거 같애, 그 사람들 성경책에서. 그러니까 성탄절에 같이 모입시다, 이런 말 하지 마세요. 끼리끼리 모여서 노세요, 재밌게. 그날은 태양신의 축일이었다니까요. 그 날을 왜 우리가 기념 하냐고요? 그걸.

그리고 그 예수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아들의 대표인데 나를 축하해야지, 그럼 왜 그 예수가 오신 걸 축하해요?

자 그렇게 우리는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의 빚을 탕감해주고 또 빚 갚으세요, 라고 입을 벌리고 있는 이러한 이웃들에게 그걸 전해주어 또 빚진 자로서 내 빚을 또 탕감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채무자는 거룩한 채무자에요. 거룩한 빚진 자. 그래서 사도바울이 서로서로 빚지면서 살아라, 하고 이상한 말을 한 거예요.

롬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그런데 어떤 빚은 져라, 그러죠? 사랑의 빚이래요. 그것도 빚은 빚이잖아요? 사랑의 빚은 져라.] -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그런데 왜 너희들은 율법으로 빚을 갚으려고 하고 사랑의 빚은 아무 관심이 없니? 이런 말이에요. 너희들은 왜 율법의 행위로 그렇게 열심히 빚을 갚으려고 하고 왜 사랑의 빚이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모든 율법은 사랑으로 완성된 건데. 니들이 사랑으로 서로 빚을 갚으면 그 율법은 너희들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거라고 얘기를 하는 거란 말에요.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덕절 하지 말라, [이거 산상수훈 아닙니까?] 탐내지 말라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걸 그 표피, 문자대로 지키면 안 된다는 거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그게 다]들었느니라 [그게 다 그 말이야, 이런 말이잖아요]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모든 그 율법의 그 세목들은 바로 그것을 진리로 올바로 깨달아 사랑을 흘려주라는 얘기였지 그래서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언제 그 율법을 하나하나 지켜서 그걸로 빚을 갚으라고 했어? 그러는 거죠. 만약에 다른 이에게 너희들이 그 말씀을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 그 빚을 탕감해주는 말로, 용서의 말로 전해주지 못하면 너희들은 그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거야, 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사랑이 이웃에게 어떻게 악을 행하니? 그러잖아요. 사랑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흘려, 서로 흘려주는 것을 이야기해요. 서로서로 빚진 자로 사는 거예요, 이것이. 그러니까 빚진 자, 이게 나쁜 게 아니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빚진 자는.

서로가 서로의 율법의 빚을 탕감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성도란 말에요. 서로서로 빚을 갚는 형국, 그것이 진리 안에서의 교제라는 거예요. 코이노니아. 그게 서로서로 빚진 자로 사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주어서 율법의 빚을 더욱 가증시키는 자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게 아니란 말에요. 그게 악을 행하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진리이신 하나님을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올바로 깨달아서 그것이 하나님 사랑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랬잖아요. 그럼 하나님을 사랑하라, 라는 말은 뭐겠어요? 그 사랑이신 하나님을 그분이 어떤 분인지 내가 잘 깨달아 알면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란 말에요. 그것이요. 엉뚱하게 오해해가지고 그분을 빚쟁이로 만들어버리면, 아니, 채권자로 만들어버리면 나에게 빚을 받아내는 그런 채권자로 만들어버리면 그건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라니까요. 열심히 섬겨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분노하셨던 거예요. 그렇게 열심을 부려 제사 드리고 열심을 부려 율법 지켰던 그 바리새인들에게 대노하셨잖아요. 왜 나를 모독해?

자, 그렇게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을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올바로 깨달아서 그것을 구하는 자들에게 잘 전달을 해주면 그것이 나에게 빚을 갚으세요, 하는 자들이니까 내 빚을 갚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율법의 빚도 갚아주는, 그러죠? 서로서로 빚을 갚고, 갚아주고 탕감해주는 그런 빚진 자. 거룩한 빚진 자들의 삶이다, 라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빚 갚으심의 일인 그런 자기 계시,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신 게 은혜를 우리에게 흘려주시는 거고 그게 생명의 말씀이고 그렇게 빚 갚으심의 일인 자기계시, 즉 진리의 수여를 통해서 우리의 빚을 탕감 받고 하나님을 내가 그 탕감을 받는 즉시 나의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채무자의 자리에서 내려오시게 되겠죠? 그죠? 그게 내가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로 돌려드리는 거란 말에요. 그분이 나에게 그 은혜를, 빚을, 약속을, 언약을 주셨어요. 흘려주셨어요. 내가 알았어, 깨달아 알았어요. 그걸 모르면 그분은 나에게 있어서 영원한 채무자라니까요. 근데 내가 받았어요. 받아서 해결이 됐어. 탕감을 받았어요. 그러면 그분은 더 이상 나에게 있어서 채무자가 아니라 하나님이란 말에요.

사랑이란 말에요, 그분은, 그 때부터.

그렇게 하나님을 채무자의 자리에서 해방시켜드리며 우리 자신을 용서하고 그 용서의 말씀을 다른 이들에게 흘려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율법적 채무를 변제받게 만들어줄 뿐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도 다른 이들에게 또 거룩한 빚진 자가 되어서 빚을 갚는 사랑의 매개체로 살게 만들어줄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들을 성도라고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셨던 겁니다.

마 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우리가 우리의 이웃의 죄를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면 이게 ‘아피에미’,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용서의 이야기에요 이것이. 자유롭게 형제의 죄를 풀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하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널 못 풀어준다는 뜻이에요.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그 빚 갚기에 의해서 진리의 말씀을 받고서 그 용서를 받은 자는 그 용서가 뭔지 반드시 다른 이들에게 설명해줄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럼에도 형제에게 자신을 용서하고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말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율법으로 얽어매는 말을 전해주는 자가 있다면 그가 어찌 그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빚 갚기의 그 은혜, 그 사랑을 경험한 자이겠느냐? 이런 말이에요. 아, 네 이웃이 너에게 해코지한 거 그거, 용서 안 하면 하나님도 너 용서안 한 대. 그러니까 이를 악 물고 용서해버리는 거? 하나님은 그런 거 원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이 악 문자들이 천국에 몽땅 다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평생 거기서 이를 간다니까요.

자, 이 말씀이 어떤 말씀의 결론인 줄 아세요? 너희들이 각각 중심으로 너희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면 천부께서도 너 용서 안 해 이 말? 이게 어떤 말씀의 결론인 줄 아세요? 일만 달란트 빚진 자, 근데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멱살을 잡고 감옥에 처넣어버린 그 어처구니없는 그런 어리석은 종의 비유, 천국의 비유 바로 밑에 결론으로 붙어있는 거예요.

일만 달란트라는 것은 고대 시대 때 아주 상상을 불허하는 액수라 그랬죠? 한 국가가,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이 로마에게 일 년 동안 바쳤던, 나라가 바쳤던 조공이 팔백 달란트니까 일만 달란트를 개인이 어떻게 갚아요? 못 갚는 돈이라는 것을 그냥 예수님이 예로 들은 거예요. 상상할 수, 그 때 당시의 사람들이 그게 얼마야? 이렇게 상상할 수도 없는 돈. 그게 일만 달란트죠. 근데 그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어떻게 빚을 졌는지 모르겠지만 그 빚진 자가 채권자인 주인에게 뭐라 그래요? 한 번 보세요.

마 18:23-26

이러므로 천국은 [ 자, 천국, 섬김이라는 건, 바실레이아가 섬기다, 통치하다, 라는 말이지만 섬기다란 말이니까. 섬김이라는 건]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그게 그의 실존이에요. 그 어떤 것으로도 갚을 게 없는 자. 이게 역사 속 아담들의 실존이라니까요. 갚을 게 없는 자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한대 [이거 하나님이 욥에게서 뺏어간 겁니다. 그리고 그에게 진리 주신 거예요. 그가 이 땅에서, 이 역사 속에서 가치라고 갖고 있는 고것들 다, 이런 말이에요. 그것들 다 팔아서, 그걸 다 팔면 너는 나에게 빚 갚을 수 있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금요. 그거 팔아봐야 얼마 된다고? 아니, 자식 마누라 팔아봐야 얼마 받아요? 근데 그거 팔면 다 팔아오면 빚 면제해줄게, 이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자, 주님이 부자 청년에게 너, 니가 가진 거 다 팔아 푸토코스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나를 따라. 그러면 영생이야 라고 얘기했을 때에 그 ‘다 팔아’. 값진 진주를 찾아다니는 진주 장사가 값진 진주를 발견하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거 사죠? 그 때 그 말이에요,이게. ‘다 팔아’. 니가 여태까지 빚을 갚겠다고 니 소유로 갖고 있는 그 모든 율법적인 열매들 다 팔아 내 빚 갚아. 이런 얘기에요. 그럼 갚는 거야. 라고 이야기하죠? 그 때 그가 뭐라 그래요?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가로되 [참아주세요, 다 갚으면 될 거 아니에요? 그랬다고요.] 내게 참으로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걸 판다는 얘기가 아니라 [내가 갚는다니까, 참으세요! 그러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 대 앞에선 이 크로노스를 살아가는 이 세상, 이 땅의 아담들의 실존인 거예요, 이것이. 아, 갚는다니까? 내가 갚는다니까. 그 때 이 임금이 그 나라, 그 섬김, 하나님의 빚 갚기가 무엇인지를 그냥 한 방으로 설명해줍니다.

마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이걸 은혜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 불쌍히 여기다, ‘스폴랑크니조마이’ 라는 것은 주님께서 병자들의 병을 고쳐줄 때 있죠? 민망히 여기사, 이게 다 스폴랑크니조마이에요. 불쌍히 여기신다는 거. 긍휼히 여기신다는 거예요. 긍휼의 마음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거반 죽은 강도 만난 자를 불쌍해 여겨, 할 때도 그 단어에요. 스플랑크니조마이. 탕자를 기다리던 아버지가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를 불쌍히 여겨 , 이게 같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불쌍히 여기다, 스플랑크니조마이는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 불쌍히 여긴다니까요. 그래야 살아요.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이 그 종에게 임하면 그 종의 빚이 그냥 거저 탕감되는 거예요. 그걸 천국, ‘하나님나라의 섬김’ 이라 그래요. 구원은 바로 이런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탕감을 받았다고 하는 자가 동관을 만나는데 동관이란 같은 주인을 섬기는 종, 이런 말이에요. 근데 그 동관도 빚이 있었어요.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종이 그 동관의 목을 잡았다고 그러죠? 이 ‘푸니고‘라는 단어가 숨 막히게 하다, 질식시키다, 라는 말이에요.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 숨, 호흡 이라는 것은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헤’ 라는 단어 자체가 말, 이라는 뜻이에요, 또. 소리, 말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숨을 못 쉬게 질식시켰다는 말은 그 내면에 이런 말이 숨어있는 거예요. 악한 말로 그를 숨 쉬지 못하게 죽이는, 그런 형국인거죠. 그죠? 목을 잡았다. 자신은 이미 구원에 이르렀다고 자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자들이 상대방의 빚을 탕감해주기는커녕 잘못된 말로 그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율법의 감옥에 처넣어버리는 그런 작태를 에피소드 화 해놓은 거예요. 주인이 나를 용서했대요. 일만 달란트 탕감을 해줬대. 그런데 또 다른 빚진 자를 만나서는 그의 목을 졸라 감옥에 처넣어버리는 거, 율법의 감옥에. 그 푸니고라는 단어가 여기서 쓰였어요.

막 4: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 떨기는 율법이죠]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자, 율법에 의해 기운이 막히다, 가 푸니고에요. 질식해버리는 거. 율법은 사람들의 그 생명, 호흡, 진짜 호흡인 푸뉴마가 아니고 가짜 호흡이기 때문에 그들이 숨을 못 쉬고 질식해버리는 거예요. 율법으로. 그게 푸니고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호흡을 주지 못한다는 거예요.숨을 주지 못해요. 생명을 주지 못하고 그를 질식시켜버려요. 죽여 버려요, 오히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았다고 하는 자가 그런 악한 말로 빚진 자를 감옥에 처넣어버린 거예요. 임금이 그를 뭐라고 그러죠? 악한 종이라 그래요. 아까 우리 바울의 이야기 속에서도 그 악하다, 라는 말이 나왔었죠? 같은 말이에요. 그건 악한 거야. 그게 악이라는 거예요. 아무튼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서 씨로 간직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용서하고 이웃들에게도 용서를 전하며 그 빚을 탕감해주며 그들에게 빈진 자로서의 자신의 빚도 탕감 받는, 그런 서로서로 사랑의 빚을 진 자들로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게 안 되면 그는 악한 자에요. 포네로스.

다음 주에 공부하겠지만 다만 악에서 구해주세요, 가 그 악이에요. 그거 못하면 그 악에서 못 나오는 겁니다. 다 연결이 돼있단 말에요.

이 용서의 이야기가 왜 주어지게 된 거죠? 베드로 때문이에요.

마 18: 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른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490번?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의 죄를 얼마나 용서해줘야 하냐고 물어봤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헵토메콘타키스 헵타’, 이 말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말이 아니라 일흔, 칠십이라는 부사에요, 그건요. 그리고 칠이라는 명사를 그냥 붙여놓은 거예요. 칠십으로의 칠. 이런 거죠? 그죠? 굳이 번역을 하자면 칠십이라는 성격의 칠로 ‘아피에미’ 오늘 본문의 그 단어와 똑같애요. 용서해. 자유롭게 해줘. 이런 말이에요. 쉬게 해줘.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칠이라는 건 안식의 숫자죠? 창세기의 칠. 그 숫자 이야기하는 거예요.

당시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 그 칠을 어떻게 지켜내고 있었어요? 율법으로 지켜내고 있었죠? 그 칠을 율법으로 지켜내고 있었다니까요. 십으로, 율법으로 칠을 알아야 되는데 이 칠이라는 걸 십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거죠. 거꾸로 이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을 통하여 안식에 이르겠다, 라는 아담들의 욕망을 나타내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칠로 안식이 됩니까? 칠이면 됩니까? 라고 물은 거예요. 그 행간을 보면.

마침 베드로가 일곱 번이요? 라고 하니까 주님이 그걸 받아서 당신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지금 그 안식을, 그 칠을 율법으로 지키고 있잖아? ‘그 칠’은 안 된다는 거예요. 칠십으로의 ‘그 칠’이어야 된다고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근데 이들은 구약에 능통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게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았다니까요. 여러분 칠십의 칠 이라는 게 어디에 나와요? 칠은 이레니까. 하루 이틀 닷새 엿새 이레. 칠십 이레라는 말을 하신 거예요. 칠십의 칠.

여기 한 번 보세요. 제가 그 때 숫자를 설명해드릴 때 성경에 나오는 숫자. 창세기에 칠이라는 안식, 언약의 수, 안식의 수가 나온다 그랬죠? 근데 이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설명해줘야 되는데 이걸 우리가 몰라요, 뭔지[ 칠, 안식]. 그 안식이 뭔지.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10계명을 주시죠? 율법을 주시죠? 율법을 주시는데 이것을 갖다가 다섯 개, 다섯 개로 설명해주고 주님은 이걸 두 개로 축약을 또 해주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산상수훈에서는 이걸 셋과 넷으로 설명해주죠? 살인, 간음, 거짓증거 [3] 그리고 그거 완성하는 게 사랑, 넷이야 [4] 이렇게 설명해준단 말에요. 그래서 요게 되면 그게 칠[7]이다, 이렇게 설명해준단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안사람들이 열둘 [12]이 되는 거죠. 그들이 아들이란 말에요, 아들. 열둘은 아들의 숫자니까. 벤 야민- 이게 오른 손의 아들. 아들의 완성이라는 거고. 열둘의 첫 번째는 누구에요? 르우 벤. 르우가 ‘라’에서 온 거니까 아들을 봐라, 내가 아들을 이게 설명해준다. 그래놓고 열둘, 맨 마지막에 벤 야민- 이것이 아들이야. 근데 그 아들이라는 단어가요, 이 단어가 송아지라는 뜻도 있어요. 황소의 새끼, 이런 말. 그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황소의 새끼 이 송아지, 벤, 이걸 잡았다, 라는 건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이 그의 육을 잡아서 죽여 버리고,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해요. 황소의, 진짜 그 소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가 죽고 탕자가 살아나는 거거든요. 그거는 그 안에서 그 탕자, 둘째를 죽여 버리고 아들로 살려내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벤 야민, 오른 손의 아들, 아들의 완성 이게 열둘이란 말에요. 열둘.

그렇게 아들이 되면 이들은 이, 십으로 이 칠을, 안식을 안자가 되는 거죠? 그래서 십으로 칠을 안자가 되면 이게 칠십이 된단 말에요. 그래서 열두 지파가 나와서 거기에서 칠십 장로가 서게 되는 거고 열두 사도가 나중에 칠십으로, 칠십 명이 아니에요. 거기 보면, 원문을 보면 그들을 칠십으로 보낸다, 그래요. 둘 씩 짝으로 칠십으로 보낸다, 그런단 말이죠. 그러면 이, 칠십이라는 건 이, 십으로 칠이 되는 거지 이, 칠, 안식을 이, 열로, 이걸로 도달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그러는 거예요. 용서라는 거, 안식이라는 건, 칠입니까? 그가 알고 있는 건 율법으로 지금 칠에 당도하는, 안식일을 열심히 지키는 그거밖에 없단 말에요. 베드로가 알고 있는 건. 그 때 주님이 그 얘기를 받아서, 우리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리 교회에게, 아니지, 그 칠이 아니라 칠십의 칠이지. 그래서 부사 명사 이렇게 쓴단 말입니다. 그러면 칠십의 칠, 칠십 이레가 뭔지 알면 주님이 저 용서를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알게 되겠죠? 그죠?

칠십 이레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다니엘서는 유다가 BC 586년에 망하죠?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하필 바벨론이에요. 바벨론이 바벨이에요. 바벨탑의 바벨. 거기엔 탑이라는 말도 없어요. 그냥 바벨이에요. 바벨론 바벨 같은 단업니다. 그 바벨론에게 유다가 망하고 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기록된 거죠, 다니엘서가? 그러니까, 거기는 이 세상에 포로로 잡혀 와있는 여러분 생각하시면 되는 거예요. 근데 이 세상 왕들은, 느부갓네살이 뭐라 그래요? 다니엘한테? 내가 무슨 꿈을 꿨다. 근데 생각이 안 나. 너, 내가 무슨 꿈을 꿨는지도 맞추고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도 좀 해줘! 그래요.ㅎㅎ. 그런 황당한 요구가 어디 있어요? 그 말은, 여러분, 꿈이라는 게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면 꿈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성경이 꿈, 환상 그러면 우리에게 허락된 이 유한한 세상. 우리의 인생을 이야기해요. 그걸 꿈이라 그래요. 근데 성령이 임하면 환상을 본다! 그러죠? 그게 뭔지를 안다는 뜻이에요. 이상한 걸 본다는 뜻이 아니라. 요엘서에 나오잖아요?

그렇게 이 꿈같은 이 세상을 사는데 이 세상 왕들, 모든 아담들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왕들은 그 꿈이 뭔지도 모르고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너는 지금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거고 그건 하나님이 이런 이유로 준 거야, 라고 설명을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나라에 우리가 잡혀 와있으니 얼마나 속이 터지냐고? 답답한 거죠.

자, 바벨. 그 바벨이라는 건 바랄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건데 그게 섞다, 라는 뜻이에요. 섞는 것은 항상, 그러니까 누룩이 어디에 섞이면 항상 술이 나오죠? 술, 그러면 성경에서 섞인 것이에요. 섞여서 창조된, 창작된 어떤 것. 인간 세상의 어떤 것. 섞으면 다 율법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런 걸로 줬는데 인간이 자기의 마음을 섞어버리면, 인간이 소위 양심이라고 하는 그걸 섞어버리면 그 술이 된다니까요. 인간들을 미혹하여 섞어버리는 술. 섞은 거. 그걸 바벨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거기에서 언어가 섞이는 일이 일어나는 거,상징적인 거죠.

그러한 곳에 그렇게 섞이면 거기가 심판이에요. 그곳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갑니다. 들어가 가지고 거기에서 그 섞인 자들과 방불하게 살다가 어떤 은혜에 이지 그들만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그 안에서 사는 그 기간이 칠십 이레에요. 그거는 이 역사 전체를 가리키는 겁니다. 다니엘서 9장에 보면. 그러니까 이 역사 전체가 우리가 포로로 사는 시간이에요 여기가.

거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요. 칠십 이레. 그 때가 되면 너희들이 풀려날 거야. 그 유다가 516년에 완전히 풀려나죠? 조금씩, 조금씩 잡혀가다가 또 조금씩, 조금씩 풀려나서 나중에 계산해보면 그냥 칠십 년이에요. 그래서 <칠십 년 포로생활> 그러는 거죠.

하나님은 유다가 안식년을 지키지 않아서 그 땅을 쉬게 만들기 위해 칠십 년의 포로생활을 그들에게 허락했다, 그래요, 성경은.

그러니까 쉬어야 되는데 너희들이 뭔가에 쫓겨서 쉬지 않고 안식하지 않고 열심히 달려버리면 하나님은 그걸 심판하신단 말에요. 그래서 칠십 년을 그 땅을 쉬게 하세요. 당신 백성들의 땅을. 근데 안식년은 칠년 마다 한 번씩 돌아오죠?

그러니까 칠십 곱하기 칠, 칠십 이레가 거기서 나온 거란 말에요. 칠십 번의 안식년을 너희들이 어겼다. 그러니까 칠십 년 동안을 내가 이 땅을 그냥 아예 쉬게 만들어버리겠다, 그러니까 매년이 안식년이에요, 거기는. 그 포로생활 전체가. 그러니까 거기에서 그게 뭔지를 알면 그들은 이 바벨론에서, 바벨에서 안식을 할 수 있다라, 는 거예요. 그게 뭔지를 알면. 왜? 그게 안식의 기간이거든요.

칠십이라는 것 자체가.

안식이라는 건 너희가 열심히 율법으로 지켜서 너희에게 찾아오는 게 아니라 내가 강제로 너희에게 너희 땅을 혼돈과 공허로 만들어, 텅 비게 만들어서 그 땅을 부정해버림으로 너희의 안식이 오히려 완성이 되는 거다, 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너희에게 허락한 시간이 바로 칠십 이레라는 거예요. 칠십으로의 그 칠이야, 라는 거예요. 율법이 아닌 은혜다, 라는 이야기. 그러면 그 안식에 희년이 오는 거예요. 그 희년은 오십일 [50] 그래서 오순절, 그날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이제 인간으로서의 역사가 끝나는 거예요. 육신으로서의 역사가 끝나는 거예요. 그게 칠십 이레의 이야기란 말에요.

그러면 지금 주님께서 칠로 용서할까요? 라고 문는 베드로에게 칠십의 칠로 용서를 하라, 라는 게 무슨 말이겠어요? 인생은 율법으로 용서가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가 되는 것임을 가르쳐주시는 거예요. 이 모든 역사가 사실은 용서의 역사라는 거예요. 용서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역산데 그걸 아는 자는 나올 것이고 모르는 자는 그 바벨에서 죽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 용서를 여러분이 알아먹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바벨, 이 지긋지긋한 야차들의 세상에서 안식을 하며 자유롭게 사는 이들이 있다니까요. 누가 뭐라 그러든 말든. 그래서 그 바벨이라는 단어가 섞다, 라는 뜻과 함께 기름붓다, 라는 뜻을 함께 갖고 있어요. 그 바벨, 섞은 것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그에게 기름이 부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벨이 뭐 나뻐요?

성도들에게는 거기도 천국이라니까요. 거기서 기름 받으면 되는 거예요. 진리의 말씀 받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용서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심판대에 왕 앞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기다려 주세요, 내가 갚을 게요’ 라고 나선 거예요. 나는 칠[7]로 할 거예요, 끝까지. 그런 거죠. 그럼 너는 용서를 모르는 거야.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는 칠십 이레에 쏟아 부어진 그 용서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인 거예요. 성경이 그런 말이 나오죠? 하나님은 모든 자가 구원받기를 원한다, 그게 그런 말이에요. 하나님은 이 역사를 그 용서를 위해 만드셨다. 당연히 모든 이가 구원받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 못 받아. 그걸 설명해주는 거예요. 그 ‘모든 자가 구원받기 원하다’ 고 하니까 뭐 하나님이 보편구원론을 이야기하셨다고 이야기하는데 천만의 말씀! 성경을 그냥 그렇게 몇 구절만 뽑아가지고 자기 신학을 만드는 데에 사용하면 안 돼요. 사람이 만든, 창작해낸 엉터리 신학이란 말입니다, 그것은.

그래서 그 임금이 그 칠십 이레를 이해하지 못한 그 종에게 빚 탕감을 선언해주었음에도 그것이 뭔지 모르고 다른 이에게 빚 탕감의 복된 소식을 전해주지 못하고 그를 오히려 목 졸라 감옥에 가두는 자로 어떤 이들은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듣는다고 해서 여러분이 다 진리가 됐다, 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사도바울이 그런 말 하죠? 야, 내가 너희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혹시 버림을 받는 자가 될까 하노라, 라는 이런 말을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면 사도바울이 진리를 알고 나서 혹시 내가 이렇게 내 몸을 쳐서 복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을까? 라고 걱정했다는 말이 아니라, 너희들이 다 듣는다고 해서 그 듣는 것이 너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그런 말이에요.

실지로 그렇다니까요. 사람은요 자기가 깨달았다고 하는 것을 확신으로 막 말할 때는 그 확신에 자기가 넘어갑니다. 내가 그걸 확신하고 있는 줄 착각해요. 자기가 그 얘기를 막 할 때는. 그런데요, 내가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멈추잖아요? 그게 자기의 마음이 되지 않은 자들은 그 때부터 불안하기 시작해요. 그래서 루터나 스펄전이나 이런 사람들이 죽기 전에, 하나님 혹시 나 이렇게 써먹기만 하고 지옥 보내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 의심에 흔들렸던 것이 그런 연유에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단순히 여러분이 여기에 와서 이걸 듣고 있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았다고 착각하시면 안 돼요. 그것으로 여러분이 여러분을 용서했는가? 그리고 그 용서를 남들에게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가? 자꾸 자기를 묵상하고 상고해봐야 돼요. ‘나’를.

자, 그렇게 동관, 백 데나리온 빚진 자, 그를 용서해주지 못한 그 자는 바벨에서 그저 바벨이라는 그 섞은 재료로 열심히 탑을 쌓고 있는 사람에 불과한 거예요. 그것을, 하나님이 용서라는 것을 줬는데 그것을 진리로 읽어내지 못한 사람의 모형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같은 처지의 동관을 자유롭게 풀어주지는 못할망정 감옥에다 처넣는 자가 된 거죠. 바울은 이 땅에서 그 바벨, 섞다, 라고 했죠? 그 바벨을 통하여 다른 바벨, 기름부음이라고 했어요, 그거는. 거기에 당도해야 하는 성도의 현실을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롬 15: 25-27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요건 이방이죠]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여기 빚진 자가 그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의 오렐레토스]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냥 얼핏 보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마게도냐와 또 아가와 사람들이 신령한 것을 받았으니까 그들이 어려울 때, 육신에게 필요한 구제헌금, 돈을 보내는 게 마땅한 거 아니냐? 이런 말로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이걸로 이제 헌금을 착취하는 데 자주 쓰는데. 그렇게 보이죠? 여기에 무슨 뭐 구제, 헌금, 돈이라는 단어도 없고 무슨 동정했다, 그런 말도 없어요. 그냥 교제했다, 라는 말이에요. 코이노니아라는 단어에요. 그리고 여기에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이 페네스가 아니라 푸토코스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은 율법의 중심이죠? 거기에 있는 푸토코스, 심령이 가난한 자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절대적 가난. 그들에게 이방적인 어떤 것들이 가서, 오히려 예루살렘 밖의 어떤 것들이 가서 그들을 섬기는 그 일을 하는 거예요. 그 일을 위해 내가 가겠다, 라는 그런 말이에요, 이것은요. 헌금 들고 찾아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면서 27절에서 그 섬김이 어떠한 방식의 섬김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요.

이걸 원문으로 보면요 ‘빚진 자들은 이방적인 것 안에서 어차피 우리는 이 땅에서 살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로 해석되지 않으면 그걸 이방적인 것이라고, 에뜨노스가 여기선 중성으로 쓰인단 말에요. 그러면 이방인이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중성으로 쓰이면 그건 이방적인 것이라고 해석해야 된단 말에요. 그러니까 이방적인 것 안에서 푸뉴마, 신령한 것으로 교제를 하는 자들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그 아래 것들 갖고 내 말 갖고, 성경을 가지고 그 예수를 이야기하면서 그 안에서 그 신령한 것으로 전달해주는 자들이라는 거예요. 그게 빚진 자들의 마땅한, 이라는 단어도 빚 갚다, 라는 뜻이에요. 마땅하다, 당연하다, 란 뜻이 아니라니까요.

빚진 자들은 그렇게 이방적인 것 안에서 영적인 것들로, 신령한 것들로 교제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 그 육신 적인 것 안에서 진리로 전해주는 그 행위를 하는 그것이 빚 갚는 거야. 라는 말이에요. 이 말이요. 그러니까 당연히 여기 안에서 여러분들이 그런 것들을 가지고 그 진리를 설명해주면 여러분이 그걸로 빚 갚는 거라니까요. 그들이 용서 받은 자요, 용서하는 자란 말에요.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란 말입니다. 내 안에서 그 빚이 탕감되게 해주세요. 용서되게 해주세요. 그리고 나도, 그렇게 되면 나도 나를 용서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합니다. 이런 말.

그러니까 여러분이 뭐 과거에 무슨 일을 했던 뭐 어떤 사람으로 살았던 너무 자부심 갖지도 마시고 거기에 너무 묶여 있지도 마세요. 그건 교만한 것보다 더 나쁜 거라니까요.

성도의 목적지가 아,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라고 했더니 그냥 주구장창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거기에 머물러 있어요, 그냥. 아니라니까요. 그래요, 내가 죄인이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와 사랑으로 나를 의인 만들어 줬다, 까지 가야지 그냥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그러고 앉아있으면 그래, 너 죄인이야! 그럴 거예요, 하나님이. 누가 뭐래? ㅎㅎ.

아니,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그 은혜, 그 사랑을 퍼부어주셔서 내가 이렇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까지 가는 거지.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끝? 그래요, 그럼 넌 죄인이니까 지옥가라! 그러실 거 아네요? 하나님이?

그게 오펠레테스, 빚을 갚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 셋이라는 떡을 예수라는 문을 두드려서 받아낸 그 친구가 자기를 그 떡으로 배불린 다음에, 용서한 다음에 다른, 그 떡을 필요로 하는 아니테오, 구하는 빚 갚으세요! 하는 또 다른 친구에게 전해주는 그 이야기가 그래서 이 주기도문 밑에 붙어있는 거란 말에요. 그게 용서야. 그게 떡 이야기야, 이렇게. 그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이고 진정한 교제, 코이노니아 이며 그것이야말로 성도의 사랑인 거예요. 그런 면에서 이렇게 우리가 뭐 구역 같은 거 나눠주지 않았는데도 삼삼오오 모여서 바로 그 사랑의 이야기를 하고 하는 그런 것들 이건 정말 바람직한 거예요. 그러니까 자주 모이셔서 서로서로 이렇게 빚 진자로써 

그 사랑을 나누시면 됩니다.

그냥 교회에 온 사람들 나가는 뒷구멍 막는다고 어떻게 조직을 만들어서 씨줄 날줄로 엮어서 이거 관리를 해야 돼! 라는 의미에서의 구역 이런 거는 하나도 필요 없어요. 그거 관리해서 뭐할 거예요? 아닌 사람들은 빨리빨리 나가야지 뒷문으로. 그러니까 그렇게 그 진리에 연합이 되는 그런 이들끼리 모여서 그 사랑의 나눔을 하시면 됩니다. 다른 거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그래서 주님이 주인의 것으로 다른 이들의 빚을 막 탕감해준 그 불의한 청지기를 아, 너 지혜 있다. 그런 거예요. 그래, 그게 지혜야. 그런 거예요. 주님의 것,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걸로 자꾸 이렇게 용서해줘. 탕감해주는 거예요, 빚을.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거 지혜 있어,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그 일 하시면 돼요. 많이 용서하시며 사십쇼. 많이 탕감해주면서 사세요. 그걸 하나님을 빚쟁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리로 옮겨드리는 삶이라고 하고 그게 영광을 돌리는 삶, 영화롭게 하는 삶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엉뚱하게 섬겨서 사랑하려고 하지 마세요.

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잘 아시겠죠? 이제? 네, 다음 주에 그 다음 거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빚 갚음의 사랑, 빚 갚음의 은혜로 우리의 빚을 탕감 받았고 우리를 용서했습니다.

그 용서,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또 흘려주어 빚진 자로써의 나의 빚을 또 갚게 하시고 그들이 그들의 율법의 빚을 탕감 받는 기적이 일어나는 그러한 서머나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 사랑의 교제, 그러한 은혜 흘림의 교제, 그것이 충만한 서머나 교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