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이장우 목사(늘푸른 교회)/언약을 따라서

1강. 성경의 중심

Hebrew 2022. 11. 8. 14:06

1강. 성경의 중심

 

오늘부터 함께 나누려고 하는 내용은 “언약을 따라서”입니다. 왜 “언약을 따라서”라는 제목을 잡았느냐고 하면 성경이 언약(言約)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책인 성경은 구약(舊約)과 신약(新約) 2권으로 되어있으며, 구약은 옛 언약이라는 말이고 신약은 새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을 모르면 성경의 중심을 모른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이란 하나님이 말씀으로 약속하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에 인간이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십니다. 그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완성시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고린도후서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니라”

 

이런 성경의 모든 내용들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언약을 따라서 성경을 보면서 왜 이런 공부가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생각해 보려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한가지의 목적을 놓고 기한을 정해서 ‘작정기도‘라고 하는 것을 했다고 가정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작정기도가 끝난 후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았다는 응답이 하나로 일치되는 경우를 보았습니까? 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데 응답이 왜 다 다를까요? 또 기도 응답이 다 다를 때, 우리는 누구의 응답을 선택해야 합니까? 기도를 하루에 한 시간 하는 사람의 응답과 네 시간 하는 사람의 응답이 다를 때에 누구의 응답을 따라야 할까요? 성경의 답변은 자신의 기도 응답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데 내 기도 응답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엉터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이럴 경우 많은 잡음과 함께 분란을 경험하곤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의 특징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을 때의 유혹이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오직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정상으로 여깁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할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여기고 사는 것이 아담의 후손들의 속성이며 성경은 이것을 죄인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다툼과 싸움들이 왜 일어납니까? 심지어 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회 안에서조차 얼마나 많은 분쟁들이 일어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아담의 유혹을 받은 속성이 우리 안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그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창조입니다.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그런데 죄를 범한 인간들은 하나님조차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이용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성경의 도구주의입니다.

 

성경의 도구주의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에 여러 가지 도구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도구들처럼 성경도 나의 삶의 필요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을 성경의 도구주의라고 합니다. 성경을 도구로 사용하면 성경의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다 나를 위하여 존재하여야 하고 내가 중심이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내가 몸이 너무 아플 때 성경을 보면 무엇이 눈에 크게 들어옵니까?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 것이 눈에 크게 보입니다. 여러분이 목사로서 교회를 개척하였다면 가장 크게 보이는 성경 구절은 어느 것이겠습니까? 사도들이 전도할 때 하루에 3천명 5천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나도 저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것입니다. 그래서 방법론을 찾습니다.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니 그렇게 되었기에 나에게도 성령의 충만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루에 수 천 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것도 내가 개척한 교회로 오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런 것을 성경은 탐심이라고 합니다. 입술로는 전도를 말하고 부흥을 말하지만 실상은 그 안에 인간의 탐심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중심으로 성경을 보면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왜곡되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누구를 중심으로 기록이 되었습니까? (요한복음 5:39절을 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너희는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영생이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연구합니다. 성경을 거의 외우다 시피 합니다. 그 당시 이 성경은 물론 구약 성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그렇게 열심히 보고 율법을 다 지킨다는 유대인들이 모든 성경 즉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에서 증거 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요한복음 5:44절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성경을 보기는 보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없음으로 사람들은 서로 자기들의 영광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으니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들이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각자가 자기들의 영광을 위한 메시아를 기다렸기에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제자들에게서도 나타났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나의 목적과 나의 영광을 위하여 성경을 보게 되면 평생 교회를 다니며 성경을 보아도 성경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기 보다는 점점 멀어질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들은 이미 성경에 다 증거가 되어있습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온갖 능력을 행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었는데 그 날에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십니다. 결국 그 일들을 누구를 위하여 하였느냐는 말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결국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유혹 안에 있는 인간들이 모든 아담의 후손들입니다. 이들이 자연스럽게 추구하는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 세 가지 유혹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유혹을 다 물리치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경제의 성장과 종교적인 기적과 세상의 영광을 구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이런 저런 일을 하였다고 해서 과연 주님 오시는 그 날에 우리를 인정하실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중심이 무엇인지? 이 세상의 천지만물의 창조는 누구를 위하여 하였는지? 제대로 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이것을 알고 믿는 일은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말씀을 깨닫게도 하여주시고 믿게도 하여 주셔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두이레 강아지 눈만큼이라도 떠서 주의 말씀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이 말씀을 읽을 때에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