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이장우 목사(늘푸른 교회)/언약을 따라서

3강. 기도의 내용 4강. 영원 전 언약(창세전 언약)

Hebrew 2022. 11. 8. 14:08
3강. 기도의 내용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빈틈이 없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보면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기 보다는 오히려 악이 더 위력을 떨쳐 보입니다. 이런 악의 구체적인 모습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하는 것임을 디모데후서 3:1-5절에서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5) “너희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 경건한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러므로 세상이 이렇게 악이 팽배하여 보이는 것도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믿고 구하는 바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한다면 그런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에 그런 것을 구한다는 증거입니다.




(요한일서 2:15-16절의 말씀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이 무엇을 구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기도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정욕을 위하여 기도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교회를 조금만 다닌 사람이라도 기도라고 하면 기억하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7:7-11절입니다.)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을 가지고 많은 설교자들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을 준다고 하면서 악한 아비라도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과연 좋은 것이 누구 편에서 좋은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이 편에서 좋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 편에서 좋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는 떡과 돌을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보리개떡과 화산 석이라 구멍이 숭숭 뚫리고 거무튀튀한 돌을 구별 못하는 것이 아이입니다. 이런 아이가 배가 고프다고 돌이 떡인 줄 알고 자기 아버지에게 달라고 하면 그 돌을 줄자가 누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로 생선과 뱀을 구별하지 못하는 아이가 뱀을 생선으로 착각하고 달라고 하면 줄 아버지가 어디에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악한 너희라고 좋은 것을 자기 자식에게 줄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좋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좋은 것들만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 좋은 것이란 건강을 구하였는데 약함을 통하여 주를 의지하게 하십니다. 부를 구하였는데 가난하게 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십니다. 명예를 구하였는데 수치스러운 일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욱 붙들게 하십니다. 이러한 예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들 수가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주시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마태복음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 않겠느냐”




이런 본문을 평행구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과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셨지만 누가복음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차이점은 성경의 1차적인 독자 즉 읽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은 주로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좋은 것이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누가복음은 주로 이방인을 대상으로 기록된 복음이기 때문에 좀 더 구체적으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들이 좋은 것만을 생각하는 한계를 갖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좋은 것을 구하였는데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성령을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자들은 무엇을 알게 됩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또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무엇을 증거 하였습니까?


(사도행전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사도행전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그러므로 성경의 기록과 같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려 내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첫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 하게 됩니다. 바울사도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기 위하여 달려가다가 다메섹 골짜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순간부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그들이 구하는 것을 무조건 다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며 그 진리가 바로 예수님임을 증거 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6:7-14절을 봅니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이런 말씀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본론에서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우리가 성령이 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성령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됩니다. 그 책망은 내가 얼마나 일을 잘했느냐, 또는 못했느냐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의에 대하여 책망을 받는다는 말씀은 우리에게는 의로 여길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4강. 영원 전 언약(창세전 언약)




이제부터 언약에 대한 본론에 들어갑니다. 언약을 말할 때에 신학자들은 대부분 노아언약부터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원 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언약부터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인식하기로는 예수님을 먼저 인식합니다. 그래서 전도를 할 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전하는 것입니다.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우리가 인식하는 현재적인 시간과 공간속의 일이라고 하여도 이것이 영원 전에 이미 언약된 내용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보려고 하는가 하면, 이 시대는 인간의 주체성이 극대화되어 있는 시대입니다. 근대부터 형성된 인간의 주체성은 신들이 죽었다고 하면서 인간의 주체를 말하는 초인의 시대인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말한다는 교회에서조차 인간의 신화들이 찬양받고 있습니다. 말로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얼마든지 이루어낼 수 있는 보암직한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인데도 우리는 다들 암묵적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시간과 공간이라는 세계 속에 갇혀있습니다. 이런 인생들이 영원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소멸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의 불멸성을 가지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의 엄청난 무덤들이 다 자신의 사후세계를 위한 준비임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누구나 영원에 대한 희미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영원에 대한 생각이란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의 후손들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죄악 된 모습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계시를 통하여서만 영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디도서1:1-3절) “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평소에 추구하고자 하는 내용들이 얼마나 들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구하고 찾고 원하는 바들이 과연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내가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이 세상의 지위와 부와 영광을 원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이런 것들을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구했다면 하나님의 영원 전 약속을 잘못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은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사람들은 아무도 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내용을 믿는 자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까?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을 자기 때에 전도로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바울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바울 사도조차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영원 전 약속에 대하여 깊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기 위하여 가다가 하나님의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르심에 대하여 바울은 (디모데후서 1:9-10절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라고 합니다. 만약에 우리의 행위대로 한다고 하면 단 한 명도 구원 얻을 자가 없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한 바울조차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던 사람인데 어떻게 우리가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거룩하신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신 것입니다. 그 은혜란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는데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생명이며 썩지 아니할 내용입니다. 복음이라고 하면서 죽음도 이기지 못하는 썩어지고 낡아지고 더러워질 것들을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영원 전부터 약속된 언약인데 누구와 약속하신 것입니까? 성부와 성자의 언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는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이 언약은 예수님 홀로 이루어내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말로 한 약속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을 신실(信實)하시고 성실(誠實)하게 이루어내십니다. 신실은 사람의 말에 열매가 있다는 말이고 성실은 말을 이루어 열매를 맺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예수님께서 신실하게 이루어내신다는 것이 갖는 의미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시편89:1-8절입니다.) “1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2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3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4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셀라) 5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에 성실하시다는 것을 성경은 다윗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심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7:1-5절)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가졌던 영광으로 들어가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 혼자만 들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도 함께 들어가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이유는 창세전부터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심으로 주신 그 영광을 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하나님의 자기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입니다


 

'◈이장우 목사(늘푸른 교회) > 언약을 따라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7강. 노아언약(2)  (0) 2022.11.08
6강. 노아언약(1)  (0) 2022.11.08
5강. 아담 언약  (0) 2022.11.08
2강. 믿음의 내용  (0) 2022.11.08
1강. 성경의 중심  (0) 2022.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