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이장우 목사(늘푸른 교회)/언약을 따라서

2강. 믿음의 내용

Hebrew 2022. 11. 8. 14:07

 

2강. 믿음의 내용




오늘은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강에서 
성경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였지만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임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삽니까?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약속대로 성령이 임하자 사도들은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날이 되면 눈에 보이는 옛 하늘과 옛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게 됩니다.
이런 내용은 성경의 아주 기본적인 골격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우리들은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합니까? 
언약대로 이루어내시는 하나님께서 성경의 모든 약속을 다 이루셨고 이제 마지막 남은 하나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면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는
그 약속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과연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며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것은 성경의 결론입니다. 이미 2천 년 전에 성령이 오신 것이 종말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요엘서에 기록된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주시리라”는 예언은 종말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
(요엘2:28~32) “그 후에 내가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 그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신약
(사도행전 2:16~21)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 성도가 된 자들은 반드시 종말론적인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종말의 영이 임한 모습이 어떠한지를 성경에서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43~47)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런데 우리가 시간과 역사라는 공간 안에서 오래 살다보니 주님의 묵시적인 약속에 대하여는 희미해져 버렸고, 다시 오실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꿈과 비전이 더 커 보이게 되어 버렸습니다. 성도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이렇게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영광을 위한 바벨탑을 쌓으면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맞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약속에 대한 소망이 어떤 것인지 보겠습니다.




(로마서 8:22-23절을 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고린도후서 4:16-18)“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피조물이 다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고 있습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다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온 세상이 탄식하는 소리가 가득합니다. 도가니라는 영화에서 장애인들이 수화로 울부짖으며 표현하는 그런 부르짖음과 탄식들이 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이런 땅에서 좀 더 나은 교육과 좀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내면 탄식이 없어질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 오시기까지 탄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죄와 죽음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손을 놓고 주님 오시기만 기다리자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세상을 보면서 주님의 약속을 더욱 신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세상에 오직 복음만이 생명의 길임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현재보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결코 세상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물을 저축하지도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판 것이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입니다.





(예레미야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런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한 사람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소망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십니다. 그 언약의 중심과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교회에 처음 온 초등학교 학생이 여름 성경학교를 마치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이루지 못한 것이 많아서 아쉬운 죽음이다’ 예수님께서 창조주요 구원자며 심판자며 우리의 주인이라는 공부를 하고 나서 한 표현입니다. 어린아이다운 참으로 솔직한 표현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신명기 법에 의하면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인데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인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신명기 21:23) “그 시체를 나무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갈라디아서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모든 약속을 다 이루어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지상에서 하신 모든 일은 예수님 자신을 위하여 하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일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이었습니다(요한복음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래서 율법과 시편과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하시고”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언약을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면 어떤 종교적인 열심을 낸다고 하여도 복음에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에 대하여 말씀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려고 합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예수님께서 이루어 내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나의 결단과 의지와 실천력을 믿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게 되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하여서도 오해를 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하나님이 자기 언약을 이루어내시는 일에 전능하심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욕망에 따라 눈에 보이는 소망을 이루어 달라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은 기도하고 오래 기다려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것을 강청기도라고 하면서 아무 것이나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과연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서 기다리지 못하고 낳은 자식이 이스마엘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란 기껏 이스마엘 밖에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 말씀처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리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보이는 것을 향하여 달려갈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자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으니 성령님을 보내셔서 성도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로마서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 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로마서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다음의 예화로 두 번째 시간을 마무리 합니다. 어느 임금이 어느 마을을 방문하기 전에 꽃씨를 나누어주고 임금이 방문할 때에 맞이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꽃씨를 심고 정성을 다하여 돌보았는데도 꽃이 싹을 틔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씨를 심어서 임금이 오실 때에 화려한 꽃으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부끄러운 듯이 한쪽 구석에 꽃이 없는 화분만 들고 있습니다. 임금이 그 사람에게 왜 당신은 꽃이 없느냐고 하였습니다. 저는 임금님이 주신 씨를 정성을 다하여 심고 물을 주었지만 싹이 나지 않아서 그대로 들고 왔습니다. 임금이 원하는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때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눈에 보이는 꿈과 비전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은, 사람의 가르침이나, 종교적인 전통이나, 자신의 상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