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영대 목사 (주성교회)/요한계시록 강해

11. 요한계시록 2:18-29 두아디라 교회

Hebrew 2023. 2. 11. 22:15

요한계시록 2:18-29

두아디라 교회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말씀하신 것을 잘 보면 19절만 칭찬이고 26절 이하에서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을 제외하고 20-25절까지 여섯 절이 책망과 경고의 말씀이다. 우리가 이 본문을 대할 때도 두아디라 교회가 어떻게 하였길래 책망과 경고를 이토록 많이 받았는가 하는 관점이 아니라 두아디라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과 교회 아닌 모습이 어떤가를 드러내고 계신 것이다.

20절을 보면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라고 말씀한다.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네게 반대할 (일, 어떤 것이) 있다’라는 말이다. 단순히 책망하고 야단치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맞지 않는 반대되는 것을 말씀하신다는 의미이다.

성경에서 “행음”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씀한 것이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는 말은 우상과 하나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맞지 않고 반대되는 것, 그것은 곧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우상을 좇는 음행으로 하나 되는 것이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란 구약에서 아합 왕의 아내로 등장하는 인물을 상징적으로 사용한다(왕상 16:29-33). 이세벨이 이방 우상을 섬김으로써 온 이스라엘로 하여금 음행과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던 구약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과 같은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두아디라 교회가 자신을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였다는 것은 신부 된 교회가 여자를 용납하는 음행이었다.

두아디라 교회가 이런 문제를 처음부터 쉽게 받아들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세벨이 갑자기 나타나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이니까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음행하고 우상 제물을 먹도록 하였다면 거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가르치다가 결국에 음행을 하고 우상 제물을 먹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마귀나 악마적인 수법이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금방 알아볼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악마적인 수법이나 비 진리가 일시에 들통날 것으로 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은 이리가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며 선지자 노릇을 한다고 말씀하셨다.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15, 22-23)

 

거짓 선지자는 흉측한 모습으로 성도들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모습으로 유혹을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가장 복음 같은 말로 자기를 따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가장 그리스도 같은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거짓 선지자인지 아닌지 열매로 안다고 말씀하셨다.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16-21)

 

거짓 선지자를 가늠하게 하는 것은 그의 온화한 성품이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바른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열매로 안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 다시 말해서 이미 나쁜 나무이기에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고 이미 좋은 나무이기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열매란 무엇인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아니 주님의 몸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19절에서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통해 좋은 나무의 열매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여기 “사업”이란 헬라어 ‘에르곤’으로 ‘일, 행위, 사역’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일이 무엇으로 나타났는가를 말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 된 교회에게 주신 열매는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이다. 이 열매는 성령의 열매와 같은 것이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2-24)

 

성령의 열매는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믿음), 온유, 절제’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을 때 드러나는 열매이다. 그래서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말씀한다.

자칭 선지자 이세벨이라는 여인은 두아디라 교회에 음행과 우상 제물을 먹도록 하였는데 그것이 이세벨의 열매였다. 음행하고 이방의 제사 제물을 먹게 한 그것이 거짓 선지자의 모습이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지 않았기 때문에 음행과 우상 제물을 먹는 열매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 열매로 볼진대 이세벨은 거짓 선지자였다.

뿐만 아니라 거짓 선지자에게서는 회개가 나올 수가 없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21절). 주님은 이세벨이라는 거짓 선지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고 말씀한다. 회개하라고 특별한 기회를 부여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다 드러났기 때문에 그것이 십자가로 돌이키는 하나님의 시간이 주어졌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종말을 산다는 것 자체가 늘 회개의 기회이다. “회개”란 예수 그리스도의 찾아오심에 의해 생명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자칭 선지자라고 여기는 상태가 하나님의 의를 거부한 것이다.

그들에 대해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22-23절). 거짓 선지자인 이세벨을 침상에 던지시겠다고 하신 것은 음행하는 모습 그대로 두시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까지 사망에 이르겠다고 하셨다.

“그(녀)의 자녀”란 22절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을 일컫는 것이다. 이세벨의 사상에 동조하여 그와 함께 범죄하게 된 자들을 말한다. “사망으로 ~죽이리니”라는 표현은 창세기 2:17에서 선악의 지식 나무를 취한 자들이 받을 ‘죽고 죽으리라’(모트 타무트)라는 심판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즉 반드시 완전한 멸망에 이르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십자가로 그 본질이 다 드러난 상태가 종말의 때이고 곧 회개의 때이다.

그래서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24-25절)라고 말씀한다. “남아 있어”라는 말은 ‘남은 자’라는 뜻이다. 즉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요 성도를 의미한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율법의 짐이 있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주어진 자가 남은 자이고 그 남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잡고 있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굳게 잡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살피는”이란 헬라어 ‘에류나오’는 ‘찾다, 발견하다, 자세히 살피다, 수색하다’라는 뜻이다. 최종적으로 마귀를 심판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찾아서 발견하고 교회 되게 드러내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의미이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지금도 이렇게 드러내신다. 그러기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주님은 겉으로 드러난 우리의 행위만 보고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교회에 주신 열매를 보고 아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의 행위를 보시고 심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각 사람의 행위(일)로 돌려주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자기 행위에 의해 심판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게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18절)이라고 나타내셨던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드러내신 것은 1장에서는 없었던 표현이지만 구약에서 이미 나타내신 계시이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 2:7-9)

 

이 시편에서 말씀하는 “아들”이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다윗을 지칭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언약의 아들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표현한 철장(철 막대기)으로 다스리는 분을 요한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27절, 12:5, 19:15).

이제 약속이 주어진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26-29절). “이기는 자”가 “내 일을 지키는 그”이다. “내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행위이고, “지키는”이란 마음에 품고 새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죽어 교회가 된 자들을 의미한다.

“새벽 별”이란 별은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이다(민 24:17). 아브라함에게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언약의 후손을 주신다는 뜻이다. 결국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복은 진정한 언약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갈 3:16)로 말미암아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른 아침, 새벽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의 시작을 나타낸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이 시작되고 또한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을 드러냄으로 세상에 임한 심판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새벽 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신 은혜로 인해 말씀 안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세상은 이미 심판 가운데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상태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로 드러나는 것이다(2022102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