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영대 목사 (주성교회)/요한계시록 강해

10. 요한계시록 2:12-17 버가모 교회

Hebrew 2022. 11. 9. 11:17

요한계시록 강론 10

 

요한계시록 2:12-17

버가모 교회

 

요한 사도를 통해 계속해서 버가모 교회에 말씀하신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13절)라고 말씀하셨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라고 하였는데 버가모 교회 성도들이 사는 곳의 지리적인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말씀한 것으로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 즉 사탄의 보좌이고 곧 “사탄이 사는 곳”으로 ‘사탄이 왕으로 군림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버가모 교회에 대한 말씀에서 십일조를 얼마나 하였는가? 주일성수를 잘하였는가? 예배나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여 교인 수가 몇 명이 되었는가를 묻지 않으신다. 사탄이 왕으로 군림하는 상태에서 죽임을 당할 때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나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나의 믿음’이라는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남겨져 있는 상태가 곧 “내 이름을 굳게 잡은” 상태이다.

그러면 나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충성된 증인 안디바의 죽음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서머나 교회를 향해 “죽도록 충성하라”(10절)라고 하신 말씀이 ‘죽음으로 믿음이 되라’라는 뜻으로 이해하였는데 버가모 교회에서 그 말씀 그대로 드러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우리를 죽음에서 지켜주고 이 땅에서 살아남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만 남기신다.

믿음의 증거란 이런 것이다. 내 믿음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로 남기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주어져 그 이름을 굳게 잡은 상태는 사탄이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세상에서 죽임을 당한 상태가 된다는 뜻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사탄을 “이 세상의 임금”(요 12:31, 14:30)이라 하였고,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원수라고 하였다(요일 2:15, 약 4:4).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2-44)

 

버가모에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이 있었다고 하여 그곳만 사탄의 보좌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그 자리를 보좌로 삼고 일하는 상태가 세상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탄이란 다른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것들을 누리고자 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탄이라는 사실이다.

버가모 교회의 안디바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주어져 그 이름을 붙잡은 상태에 있다는 것으로 죽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주께서 그에게 자기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만드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라고 표현하여 충성된 증인이신 예수님 자신과 같은 존재로 말씀하셨다(1:5).

계속 강조하지만 예수님은 일곱 교회에 서신을 보내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칭찬하시고, 어떤 부분을 보시고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더 잘하라고 책망하시는 그런 말씀이 아니다. 버가모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를 말씀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안디바와 같은 이런 사람을 칭찬하자는 식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바로 이런 모습이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강조한 말씀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14절)라고 말씀하신다. 발람에 대한 사건은 구약 민수기 22장 이하에 언급되었다. 이스라엘이 아모리 족속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모압의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발람을 불러 저주를 해 달라고 부탁한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발람은 발락이 보내온 금은 보화에 눈이 어두워 이스라엘을 저주한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발람의 교훈을 지켜 행음하고 우상 제물을 먹었다는 것은 발람이 이스라엘에게 행음하라, 우상 제물을 먹으라고 가르쳤고 그래서 이스라엘이 그 말대로 그대로 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발람의 교훈이란 세상의 좋은 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언약 백성들을 저주한 것을 말씀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행음하고 우상 제물을 먹게 된 것 자체가 발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즉 자신의 본능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무시하는 그것이 바로 발람의 교훈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상 제물”을 먹고 “행음”하였다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원수 노릇 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15절)라고 하였다. 정확하게 니골라당의 교훈에 대한 문제가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중요한 것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예수님께서는 같은 것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세상의 것을 좇았다는 것이다. 버가모 교회에서도 이렇게 말씀을 대적하고 세상의 것을 좇는 모습이 있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모습이 십자가의 원수라고 말씀하셨다. 교회라고 해서 다 교회가 아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16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여 언약을 자신과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는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적이다. 그래서 이러한 자들과 주님은 싸우겠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이시고 자신의 몸으로 날마다 세워나가시는 것이 교회이다. 자신의 몸 된 교회를 항상 불꽃 같은 눈으로 살피고 계신다.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세워지고 드러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인간들에게 맡기신 적이 없다. 우리에게 맡기고 우리더러 교회를 잘 지켜 키우고 조직을 정비하며 관리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버가모 교회를 향해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나타내셨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12절).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지키신다. 발람의 나귀 앞에 칼을 빼들고 나타나셨던 그 여호와의 사자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준다(민 22:23,31).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말씀에 의한 심판’을 나타낸다. 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싸우고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교회는 성경에 관심 있는 자들이 모여 성경 공부하는 동호회가 아니며 예수님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 매주 모여 친목을 다지는 종친회가 아니며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것으로 자신의 살았음을 증명하는 모임이 아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인다는 것은 성령께 이끌려 우리의 죄성이 말씀에 의해 날마다 해체되고 벌거벗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되어 죽은 자임이 드러나야 한다.

그러면 교회에 주어지는 약속의 말씀이 무엇인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17절). “이기는 그에게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준다고 하였는데 ‘이기는 자’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 베임을 받아 그분의 머리로 교체된 자이다.

구약의 만나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하늘로부터 내리신 양식이었다(출 16:4). 민수기 11:7에 보면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진주”가 에덴 동산에서 언급된 “베델리엄”이고 “호마노”가 오늘 본문에 언급된 “흰 돌”이다(창 2:12). 만나는 양식이 없다고 원망한 인간들의 죄성을 전제하여 앞으로 주어질 참된 생명의 양식에 대한 상징이었고 약속이었다는 점에서 “감추었던 만나”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이 하늘로부터 온 참된 떡이요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양식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것은 곧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진 만나가 상징했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요 6:31-33).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

 

그러므로 “만나, 흰 돌”로 상징된 ‘진주, 희다’라는 것은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참된 만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성을 의미한다. 이기는 자의 승리를 정결로 표현한 것이다. 즉 교회란 사탄이 왕으로 군림하는 세상에서 정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죄와 상관없는 상태로 승리한 자들이다. 그 돌에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기존 우리의 이름을 거부한 이름이라는 뜻이다. 자기 이름을 내고 싶어 하는 죄인들의 이름을 삭제하고 오직 십자가에서 승리를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되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 이름을 굳게 잡아 승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13절).

결국 이기는 자에게 만나와 흰 돌을 준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주신다는 뜻이다. 이는 십자가로 온전히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내려진 비가 넘쳐흐르는 강이 생수가 되어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있는 땅으로 만드시겠다는 생명의 풍성함을 약속하신 창세기의 언약이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한다. 흰 돌에 새겨진 새 이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나 다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은 자만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자기 이름을 알려주신 자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무나 알 수 없기에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나 주님의 이름으로 붙잡는다고 해서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주어져 죽음이 된 자이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5-27)

 

(2022101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