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영대 목사 (주성교회)/요한계시록 강해

07. 요한계시록 1:17-20 살아 있는 자

Hebrew 2022. 11. 9. 11:15

요한계시록 1:17-20

살아 있는 자

 

 

영생이란 단순히 내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알고 믿어서 천국 간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졌다는 뜻이고 그분의 십자가에 내가 함께 죽고 새 생명으로 살아나 그분과 연합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자신이 머리였던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리로 바뀌어 그분의 몸, 즉 교회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는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날마다 내 안에 일어나는 일이다. 요한계시록의 표현대로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성도들과 함께 지금도 늘 오고 계신 상태 안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2,000여년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만 이해하여 십자가를 세워놓고 그 앞에 모여보라고 요구하시는 표시가 아니다. 완전한 새 생명으로의 창조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에서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 자들이 말씀을 좇아서 움직이게 된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마음에 새김으로 인간의 행위는 날마다 죽음으로 발견되고 어린 양으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은혜로 확인하는 모임이다.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내 공로, 내 노력이 신앙생활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믿음조차도 행위가 된다. 이렇게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고 자기를 나타내는 이유는 한마디로 죄의 권세에 매여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죽은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은 자는 자기 행위를 내세울 수 없고, 오직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되고 나타낼 뿐이다.

예수님께서 요한 사도를 묵시에 참여시켜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하셨다. 그때 요한이 본 예수님은 과거에 갈릴리에서 본 주님과 달랐다. 과거에 본 예수님은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죽기 위하여 오신 분이셨다. 즉 인자로서 고난받으시는 메시아였다. 그러나 묵시 안에서 고난받는 인자가 아니라 영광의 자리에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한 인자 같은 이로 만났다. 그 모습은 왕권을 가지신 대제사장적 모습으로 정결하고 흠이 없으신 분이며, 구약에서 언약으로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되셔서 친히 심판하시는 모습이었다.

심판주로서의 위엄과 영광 앞에 요한 사도는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17절)라고 하였다. 우선 구약 다니엘서를 배경으로 말씀하는 내용을 먼저 확인함으로 요한 사도가 왜 죽은 자 같이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자.

 

 

8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9 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단 10:8-9)

 

 

“썩은 듯하였고”라는 말은 ‘멸망, 패망’이라는 뜻이고, “잠들었느니라”라는 표현은 죽은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참고 시 76:6). “음성”은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완전히 망하여 죽은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한 것을 본 이사야 선지자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고 하였다.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신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가 본 것은 많은 물고기가 아니라 말씀의 말씀 되심이었기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죄인이 하나님과의 만남은 죽음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가 묵시에 참여하는 것은 죽은 자로서 참여한다. 죽은 자이기에 진짜 생명 앞에서 죽음만 드러날 뿐이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17절). “얹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티데미’인데 ‘놓다, 잘 배열한다’라는 뜻이다.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였는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고 인간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결코 없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로 만드시겠다는 말씀이다. 오른손이란 능력, 영광과 심판의 상징이다(출 15:6). 즉 예수님께서 권능의 손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로 만드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는 것은 어디서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하신 말씀에 있다. 이는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구약의 말씀을 근거로 한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 참고 41:4, 48:12)

 

 

하나님에 대한 표현으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1:8)라는 말씀을 이후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21:6), 또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22:13)라고 같은 말씀을 한다. 이는 ‘나는 ~이다’라고 하신 말씀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인데 구약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밝히신 ‘예흐예 아쉘 예흐예’라는 말의 번역이다. 구약에서 언약으로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내신 것이다. 즉 십자가에서 언약으로 온전히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죽은 자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자가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8절)라고 말씀하셨다. “살아 있는 자”라는 말씀으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는 말씀을 강조한다. 그래서 “세세토록 살아 있어”라고 말씀한다. 단순히 지금 죽은 존재가 아닌 살아 있음을 말씀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나 살아 있는 자와 맺으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죽은 자를 살려서 맺는 언약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신명기에 보면 언제나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지금 살아 있는 상태에서 맺는 언약임을 나타내셨다.

 

 

2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3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신 5:2-3)

 

 

그러므로 “살아 있는 자”라는 말씀은 십자가 죽음을 전제한 표현이고 그 죽음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에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라는 말씀을 덧붙인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에 근거하여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선언하셨다. “사망과 음부”란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니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6:8, 20:13-14). “열쇠”(헬, 클레이스)란 ‘닫는다’(헬, 클레이오)에서 유래한 말로 ‘여닫을 수 있는 권세’를 의미한다. 이는 이미 마태복음에서도 밝히신 내용이다.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

 

 

요한 사도는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하였다. 죄인으로 있을 때 두려운 상태에서 이제 다시 산 자에 의해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그 말씀 안에 있게 되었다.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전능하신 분에 의해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생명에 거하게 되었다. 생명 안에 있는 자만이 생명 안에 있는 자에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19-20절). 여기서도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던 것처럼 “장차 될 일”란 묵시의 관점에서 표현하자면 미래의 일이 아니 이미 이루어진 일을 말한다. 요한 사도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라고 하였고 그다음 말씀에서 바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고 말씀한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하니까 오늘날 교회들은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창세기를 통해 ‘별’에 대한 의미를 살펴본 것처럼 아브라함 언약에서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창 22:17)라고 한 말씀이나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창 26:4)라는 말씀들을 통해 볼 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된다. 그 언약의 핵심은 “씨”(후손)를 주신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민수기의 말씀은 언약의 실체를 지향하고 있는 말씀이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민 24:17)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 야곱의 후손으로 오시는 “한 별”이란 진정한 언약의 후손이신 메시아를 말씀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에서 “씨”가 번성하여 “별”과 같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 것이다(갈 3:16, 계 2:2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갈 3:7-9). 이렇게 본다면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언약이 완성된 “일곱 교회”요 “일곱 금 촛대”이며, “일곱 교회의 사자”란(헬, 앙겔로스)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를 지칭한다. 결국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의 손에 붙잡혀 있기에 그 어떤 권세나 훼방, 심판에서도 견뎌내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주신 말씀은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라는 것이었고 그 예언의 성취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너희”와 “그들”을 갈라 내시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이 “천국의 비밀”이다(마 13:11-15). 바울 사도 역시 로마의 감옥에서 쓸쓸히 죽어가면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거침없이 선포할 때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성경은 선언한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목사는 목회를 한다는 것이고, 교인들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목사는 목회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하고, 교인들은 신앙생활을 통해 영생을 쟁취하려고 한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는 목사와 교인들이 천국 대기소를 공동 운영하는 사업에 부름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부르심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단순히 주성교회에 소속된다는 것이 아니다. 요한 사도와 함께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9절)로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죽음 안에서 “처음이요 마지막”(17절)이신 “살아 있는 자”(18절)에 의해 생명을 누리는 언약이 완성된 일곱 교회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주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된 그 모습이 교회의 모습이어야 한다(2022091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