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영대 목사 (주성교회)/요한계시록 강해

08. 요한계시록 2:1-7 에베소 교회

Hebrew 2022. 11. 9. 11:16

요한계시록 강론 08

 

요한계시록 2:1-7

에베소 교회

 

 

일곱 교회에 대한 본문의 해석은 여러 가지이다. 일곱 교회를 시대적으로 나누어서 보는 것이다. 일곱 교회는 일곱 시대를 나타낸 역사적 교회의 모습으로 에베소 교회에서 서머나, 버가모로 해서 오늘날 라오디게아 교회까지 이른다고 본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 시대,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 이런 식으로 시대적 상징성의 교회로 나누어서 이해하고자 한다. 또 교회를 일곱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서 보는 이들도 있다. 세상의 교회들을 일곱 가지로 분류하여 각 특징들이 나타나는 에베소형 교회, 혹은 서머나형 교회 하는 식으로 생각해서 어떤 교회든지 이 일곱 가지 유형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해석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이 모든 해석들의 가장 큰 오류는 지금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당사자가 속해 있는 교회를 교회로 인정해 놓고 해석에 임한다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교회이든지 목회자가 새롭게 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개척을 했든지 이미 교회라고 이름 붙여졌기 때문에 교회의 시각으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려고 한다.

결국 일곱 교회에 대한 해석의 대부분이 근본적으로는 두 가지로 분류해 놓고 있다. 즉 ‘칭찬을 듣는 교회’와 ‘책망을 듣는 교회’로 분류한다. 이러한 분류 때문에 설교는 항상 우리 교회도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듣는 교회가 되지 말고 칭찬 듣는 교회가 되자고 역설한다. 해석은 다양하더라도 그 결론은 늘 동일하게 우리 교회가 잘 되고 칭찬받자는 윤리적 교훈으로 끝난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가장 모범적인 교회로 꼽고 있는 것은 책망이 하나도 없고 칭찬만 들었던 빌라델비아 교회를 들면서 우리도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그런 교회가 되자고 한다.

시대적으로 유형적으로 여러 유형의 교회로 본다면 초대교회 처음 요한 사도에게 이 서신을 받은 교회들에게는 의미없는 말씀들이 된다. 이런 점에서 어떤 해석이 성경 전체에 잘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요한 사도 앞에 심판주로 나타나셨고 요한 역시 그 주님의 심판에 동참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지양할 것은 지양하고 장려할 것은 장려해서 더 아름답고 완벽한 교회를 만들라는 훈시나 교훈이 아니다. 책망받은 것은 수정하고 칭찬받은 부분은 더욱 발전시켜서 주님이 보시는 진짜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라고 주님은 요구하신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교회가 나의 구원, 우리 교회의 시각에서 잘못 해석하고 있다.

십자가에 죽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1절)라고 하였다. 우리 성경에는 어법상 “편지하라”라는 표현이 맨 앞에 있어 강조한 것처럼 보이는데 헬라어 성경은 ‘타데 레게이’(이것을 이르시되)라는 말이 일곱 번 강조된다.

“일곱 금 촛대”란 ‘일곱 금 등잔대’이다. 성막의 등잔대는 일곱 개의 등잔을 한 달란트로 연결하여 하나로 만든다. “거니시는”이란 말은 헬라어로 ‘페리파테오’인데 ‘걷다, 행하다, 함께 가다, 교제하다’라는 뜻을 가지는데 70인역에서 히브리어 ‘할라크’의 역어이다. 창세기 3:8에서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 5:22-24에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동산을 산책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아담과 교제하시기 위해 오셨고 에녹과 함께 행하시며 교제하신다는 의미이다.

“사이”라는 말은 ‘중앙, 한가운데’라고 말씀드렸다. 예수님께서 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셔서 자신의 몸 된 교회요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며 동행하신다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일곱으로 설명하지만 등잔대는 일곱이 연결된 하나라는 측면에서 십자가에 의해 언약이 온전히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이다. 창세기에서 7일의 창조를 통해 계속 반복하여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설명하듯이 일곱 교회를 통해 반복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언약이 완성된 복음을 말씀한다. 그래서 교회들에게 나타내신 계시는 예수님 자신의 모습과 관련되어 있다.

1:20에서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고 한 바와 같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의 손에 붙잡혀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머리이시고 주인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은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소위 말하는 교회 기득권층이나 목사에게 맡기신 적이 없다. 처음이요 나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친히 다스리고 계신다. 그러기 때문에 일곱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본문의 말씀들도 결코 칭찬하고 책망하시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칭찬하고 책망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 교회를 맡기고 그것을 점검하고 평가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2-3절)라는 말씀을 에베소 교회가 이렇게 훌륭한 일을 했다고 보면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와는 빗나간 것이다. 예수님은 일곱 교회를 통해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말씀하시고 거기에 합당한가 아닌가를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에 맞는 것인가 맞지 않는 것인가 하는 것을 친히 드러내 보이시는 그런 차원이다.

예수님은 지상 교회를 두고 책망하시고 칭찬도 하셔서 부족한 것이 있으면 수정 보완해서 교회 아닌 것을 제대로 된 교회로 만들라고 하신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인가 아닌가 기준을 제시하시면서 ‘내 몸이 이런 것이다!’라고 선포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가 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고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 된 것을 누가 드러내었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일이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6절에서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 “니골라 당”이란 “발람의 교훈”(2:14-15)과 “이세벨을 용납함”(2:20)을 같은 의미로 말씀한다. 즉 우상 숭배와 음란한 행위를 주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어떻게 이끌고 계시며 주장하시는가를 보아야 한다. 주님은 악한 자를 용납하시지 않고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되게 드러내시는 분이다. 그렇게 일하신다는 것을 지상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실 뿐이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생명의 상태로 전환된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죽을 육체가 없어지지 않는 것은 이 죽을 육체를 통해서 생명을 드러내시는 주님의 일하심 때문이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육체란 인간의 죄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죽을 육체, 즉 우리의 죄성을 고발하시면서 자신의 생명을 드러내시는 차원으로 일하신다는 것이다. 주성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로 계속 성장 발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성교회의 거짓됨과 죄성을 고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신다. 이런 점에서 “네 ~을 알고 ~을 아노라”(2-3절)라고 말씀하시며 불꽃 같은 눈으로 늘 살피시는 것이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절)라고 말씀하셨는데 “처음 사랑”이란 무엇인가? 5절에 보면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라고 말씀한다.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를 같은 의미로 표현하였다. 처음 사랑에 의해서 나온 것이 처음 행위이다.

“버렸느니라”(헬, 아피에미)라는 말은 ‘내보내다, 버려두다, 이혼하다’라는 뜻이다. “떨어졌는지”(헬, ‘핍토’)라는 표현은 ‘멸망의 상태’라는 말이다. 여기서 “회개”란 처음 상태로 되돌려지는 것이다. “회개하지 아니하면”이란 말은 처음 상태로 되돌려지지 않으면, 즉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의 상태로 되돌려지지 않으면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신다. 등잔대를 옮긴다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볼 때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들)”이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 속에 언약의 메시지를 담아 생명을 이루실 사랑을 나타내시고 그 사랑을 자신의 몸 된 교회에 주셔서 하나 되게 하신 십자가의 행위가 처음 사랑이고 처음 행위이다. 우리 인간에게 사랑이 있는가? 우리에게 사랑이 있다고 해봤자 그것은 지독한 자기 사랑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의 자기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상대하여 죽일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신 사랑을 나타내셨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는 죄인들에게 사랑이 없다는 것에 대한 폭로요 고발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보여주신 현장이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5-8)

 

 

에베소 교회를 통해서 말씀하신 “처음 사랑”이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자기 십자가 사랑이 남아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애초에 주신 것이 있는가를 말씀하셨다. 우리의 것, 우리가 행한 자기 사랑을 백날 주님 앞에 꺼내 놓아보았자 그것은 심판의 대상일 뿐이다. 우리의 교회 생활은 자기 사랑에서 나온 결과물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주신 것이 있는가?

여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답변은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5,16,17)라고 그 말씀일 수밖에 없다. 이 답변을 만들어 내시기 위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자리에 두셨던 것이다. 한 번 교회는 영원한 교회,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교회라고 정의해 놓으면 그것이 계속 교회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요 엄청난 실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처음 사랑, 처음 행위가 없다면 그 상태는 이미 교회가 아니다. 혹자들은 주성교회는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있으니까 주성교회는 분명히 주님의 교회라고 오해한다. 주성교회가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아니라 주성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 된 교회가 존재하고 날마다 말씀에 의해 드러날 것이다.

이제 중요한 약속이 선포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7절). 창세기에서도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여기 본문에서도 “열매”란 말은 없다. 생명 나무를 누가 취하는가를 통해 에덴의 회복을 말씀한다(참고 겔 47:12). “이기는 그”가 취한다. ‘이기는 자’가 어떤 자인지를 이렇게 말씀한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계 20:4)

 

 

예수를 증거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이 주님과 더불어 왕노릇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기는 자”란 한마디로 목 베임을 당해 죽은 자이다.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아 날마다 생명 나무를 취하는 존재가 되었다. 성도란 죄의 권세가 지배하는 이 땅에서 창조 때 하나님께서 나타내주신 처음 사랑과 그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의 행위를 품은 자이기에 세상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이렇게 이끌고 가신다는 것을 믿는 자가 교회요 성도이다(2022092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