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영대 목사 (주성교회)/요한계시록 강해

05. 요한계시록 1:9-10 주의 날 밧모 섬에서

Hebrew 2022. 11. 9. 11:14

요한계시록 1:9-10

주의 날 밧모 섬에서

 

 

사람은 누구나 다 어떤 글을 대하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한다. 심지어 번역이라는 것도 해석이 가미되기 마련이다. 책을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도 지은이의 의도를 완전하게 다 드러내서 번역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번역을 하면서 어떤 용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역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해석이 가미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본다고 할지라도 이미 내 안에서 해석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이해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기록된 말씀으로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를 죄인의 상태 그대로 두시지 않고 주의 영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하시며 또한 복음을 드러내는 일을 충실히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위해서이다(참고 요 16:7-11). 따라서 말씀이 임하였을 때 먼저 나타나는 결과는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자기 애통이다.

지난 강론에서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7절)라는 말씀을 나누었다. 단순히 미래에 재림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늘 자기 백성들과 함께 오고 계신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님을 찌른 자임을 자각하고 애통(애곡)이 있을 수밖에 없는 회개가 있는 상태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임을 확인했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이 성경의 핵심이 아니다. 세상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찔렀기에 심판 안에 있을 수밖에 없는 상태라는 것을 폭로한다. 즉 인간의 죄를 폭로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가 되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 요한계시록이고 또한 성경의 모든 말씀이다. 그래서 시작과 마침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것을 “알파와 오메가”(8절)라고 한다.

이러한 말씀의 역할 때문에 말씀을 알게 된 자, 설교 혹은 강론을 하는 자는 자신의 생각이나 개인적인 해석을 전할 수 없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죄가 폭로되어 자존심이 무너지고 죽은 상태에서 말씀이 의도하는 바를 그대로 드러내고 전할 수밖에 없다. 진리의 말씀에 함몰된 자는 철저히 자신이 죄인이라는 전제 아래서 십자가만 드러내 주시기를 소원할 뿐이다. 자신을 자랑하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혹시 전하는 자가 자기 사상과 자기 논리를 전했다면 성령께서 걸러서 하나님의 말씀만 우리 안에 남도록 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고 드러낸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늘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전통적인 성경 해석에 사로잡혀서 성경을 이해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주 망각하기 때문이다.

본문 10절에서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주의 날”이라는 말 때문에 우리는 너무 쉽게 오늘날의 일요일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주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는 것이 일요일일 수 있다. 신약의 다른 본문에서 심판의 날을 의미하는 ‘주의 날’과 다르게 표현된 말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주의 날을 일요일, 주일로 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요한 사도가 계시를 받은 날이기에 오늘날 우리도 주일을 잘 지키고 예배하는 일에 전심을 다해야 한다는 것인가? 왜 날에만 의미를 부여하는가? 장소는 의미 없는가? 밧모 섬에서 주일에 계시를 받은 것이기에 주일 예배의 정당성을 부여한다면 주일에는 밧모 섬으로 가야하고 거기서 하는 예배만 제대로 주일을 지키는 것이 된다. 결국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말씀을 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주의 날”이란 헬라어로 ‘큐리아케 헤메라’인데 좀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주께 속한 날’이라는 뜻이다. 즉 요한 사도가 계시를 받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주님께 속한 날이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일요일이고 주일이라는 의미로 생각하기보다 묵시 안에서 전하는 메시지라는 뜻이 담겨 있는 표현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서 다르게 표현된 ‘주의 날’에 대한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이 외에도 데살로니전서 5:2, 데살로니가후서 2:2에서도 “주의 날”(헬, ‘헤메라 퀴리우’ 혹은 ‘헤메라 투 퀴리우’)을 심판의 날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표현들은 구약에서 예언한 ‘여호와의 날’을 배경으로 한 말씀이다(참고 사 13:9, 겔 30:3, 습 1:7 등).

 

 

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3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 그것을 피한 자가 없도다(욜 2:1-3)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에 대한 표현은 메시아의 오심이라는 차원에서 선포된다. 즉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은 예수님의 처음 오심과 다시 오심을 같이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셨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은 완성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요 성도는 완성된 종말 안에 사는 것이고 그것이 곧 묵시 안에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여호와의 날”, 신약에서 “주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의미로 오늘 본문에서 “주의 날”로 표현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에서 ‘주님께 속한 날’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헬라어 ‘헤메라’는 단순히 날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낮’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헤메라)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4-5)

 

 

요한 사도는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라고 하였는데 직역하면 ‘주께 속한 날 안에 내가 성령 안에 존재했다’라는 말이다. 즉 주께 속하여 있는 상태가 곧 성령 안에 있는 상태라는 뜻이다. 요한은 결코 헛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님을 ‘성령 안에서’라는 표현으로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강조하였다(1:10, 4:2, 17:3, 21:10). 비록 세상에 있지만 성도의 실존은 성령 안이고 그 안에서 보았을 때 세상은 심판이 임한 곳으로 보이는 것, 이것이 바로 주께 속한 날에 사는 상태이다.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라고 하였는데 “나팔”이란 전쟁 때(민 31:6, 수 6:5, 삿 3:27, 겔 7:14 등), 왕의 출현이나 등극을 알릴 때(삼하 15:10, 왕상 1:34-35), 제의적이거나 경사가 있을 때(삼하 6:15, 느 12:35-36) 사용하였는데 특히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임하여 언약의 말씀을 주실 때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참고 출 19:19-20, 20:18).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 19:16)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시는 모습을 그대로 요한 사도를 통해 교회에 언약의 말씀을 나타내신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어 새로운 이스라엘인 일곱 교회에 계시의 말씀이 전해진다는 것을 시내 산 상황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내 산에서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하면서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으로 언약이 성취된 일곱 교회에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는 어떤 존재인가를 9절에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라고 말씀한다. 2절과 4절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여기서는 “나 요한”이라고 하였다. 요한복음과 요한일, 이, 삼서가 요한 사도의 기록이지만 스스로를 직접 지칭한 것은 요한계시록 여기가 처음이고 22:8에 마지막으로 표현하였다. 이렇게 기록한 이유는 요한 자신을 본 서신을 받는 자들과 동일시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라고 하였다.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이라고 하였는데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예수 안에 있는 환난과 나라와 인내’라는 말이다. “환난”(헬, ‘들립시스’)이란 포도즙 틀에서 즙을 짜낸다는 뜻을 담은 단어이다. “참음”(헬, ‘휘포모네’)이란 우리 성경에 ‘인내’라고도 많이 번역 되었는데 ‘휘포’(~아래)와 ‘메노’(머물다)의 합성어로 어딘가에 머물러 빠져나갈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하나님 아래에서 빠져나갈 수 없어 머물러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요한은 ‘환난 – 나라 – 참음’의 구도로 표현하여 “나라”(헬, ‘바실레이아’)는 ‘환난과 참음’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임을 드러내었다.

이 당시 초대 교회 상황은 핍박을 심하게 받는 상황이었다. 요한 사도도 비록 밧모 섬에 있지만 핍박받고 있는 여러 성도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로 표현하기보다 “너희 형제”라고 표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환난, 나라, 참음에 함께 한다고 하였다. 비록 서로 몸은 떨어져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환난과 참음으로 그 나라의 다스림에 동참된 자들이 주님의 몸 된 교회이다. 이것이 주의 날을 살아가는 성도이다.

요한 사도가 여러 환상을 받고 이 책에 기록하여 전할 때 밧모라고 하는 섬에 있었다. 흔히 로마 시대 당시 밧모 섬은 유배지였다고 하나 확인할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최근 성경학자들의 결론이다. 어떤 이유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는 일로 인하여 밧모 섬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도록 하나님께서 요한 사도를 밧모 섬에 두셨다는 뜻이다. 섬이란 바다로 차단된 곳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찌른 자들이 에워싸고 있는 현장에서 하늘의 묵시를 전한다.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요 21:22-23)

 

 

결국 예수님께서 요한을 내가 올 때까지 “머물게”(헬, ‘메노’)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위한 것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주의 날, 밧모 섬’에 두셨지만 실제는 하나님의 묵시 안에서 환난과 참음(‘휘포모네’)에 거하게 하심으로 하나님 왕국(나라)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요한이 거하였던 밧모 섬과 같은 세상은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마 10:16)라고 말씀하신 현장이다. 그래서 성도는 환난과 인내 가운데 있지만 성령 안에 주의 날에 속하여 그 나라의 다스림을 받는 상태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으로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은혜를 확인하고 또 확인할 뿐이다(2022090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