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영대 목사 (주성교회)/요한계시록 강해

03. 요한계시록 1:4-6 그의 피로

Hebrew 2022. 11. 9. 11:12

요한계시록 1:4-6

그의 피로

 

 

성도란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내가 존재하고 있음에서가 아니라 없는 상태에서 불러내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다(롬 4:17).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라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함께 죽고 살리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죽은 자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산 자로 만드신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산 자는 날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

이것을 3절에서 “때가 가까움이라”라고 하였다. 헬라어 ‘엥귀스’라는 말은 공간적으로 근처에 서로 가까이 있다거나 시간적으로 가까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의 재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묵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바울 사도 역시 에베소서에서 ‘엥귀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렇게 선언하였다.

 

 

13 (그러나)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3-18)

 

 

요한계시록 시작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주어졌음을 선언하였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증언한다고 하였다. 객관적으로 보고 타자로서 전하는 것이 아니라 묵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된 상태로 증언한다. 그리고 요한 자신뿐만 아니라 서신을 받는 교회에게 바로 이런 하나의 관계 안에서 편지를 한 것이다.

우리 성경의 본문은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4-5절)라고 번역되었는데 헬라어 성경에는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이라고 인사가 시작된다. 그리고 하나님과 성령님,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한다. 즉 “은혜와 평강”의 출처가 하나님, 성령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뜻이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4절)라고 하였다. 본 서신을 수신하는 대상자를 “일곱 교회”라고 밝힌다. 성경에서 ‘일곱’ 또는 ‘7’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말씀으로 언약하시고 그 말씀을 온전히 성취하심을 상징한다. 일곱 날의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셨고 그 언약의 완성을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설명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이런 점에서 “일곱 교회”란 아시아의 일곱 교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발생된 교회를 의미한다. 요한 사도가 본 서신을 보내는 대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된 교회 모든 성도이다. 요한계시록은 신학을 전공하거나 성경 해석 전문가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누구는 풀고 누구는 풀 수 없는 그런 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 왕국의 비밀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계시임을 인정하는 모든 성도에게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요 성도라고 한다면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대한 계시를 말씀으로 주셨다는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요한계시록을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들로 보고 앞일을 대비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요한 사도가 증언한 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만 마음에 새기고 품어야 할 것이다. 다른 표면적이고 부수적인 것에 마음이 빼앗길 수 없는 교회의 모습이지 않을까?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4절)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의 배경이 출애굽기 말씀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것을 모세에게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 3:14-15)

 

 

“스스로 있는 자”란 한마디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그들만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과거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언약하신 하나님은 단순히 과거의 언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모세를 통해 언약을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과거에만 계셨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언약을 성취하실 하나님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말씀이다. 그래서 구약 곳곳에서 세상에 오실 분으로 묘사한다(참고 시 96:13, 98:9, 사 40:10, 66:15, 슥 14:5 등).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 41:4)

 

 

요한 사도가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아마도 17:8에서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결국 심판을 받아 멸망으로 귀착되는 짐승과 대조된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4절)이란 3:1과 4:5에서도 언급되는데 성령님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즉 창조에서 혼돈과 흑암과 공허의 상태에서 수면 위에서 땅에 대해 어떤 일을 행하셨던 하나님의 영이 “일곱 영”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해 나타내셨던 언약이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말씀한다. 결국 구약에서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며, 장차 오실 이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의미하고 일곱 영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계 5:6)

 

 

하나님, 성령님에 이어 이제 “은혜와 평강”의 출처로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5절)라고 밝힌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한 증인, 죽은 자들의 처음 나신 자, 땅의 왕들의 통치자’로 언급하였는데 이는 구약을 배경으로 한 표현이다.

 

 

27 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 38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 하셨도다 (셀라)(시 89:27, 38)

 

 

여기서 “장자”(70인역에서 ‘프로토토콘’)란 오늘 본문에서 “먼저 나시고”(헬, ‘프로토토코스’)라는 말과 같은 단어이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란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이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의 표현이다. 또한 우리 성경의 시편에서는 “확실한 증인”이라고 번역하였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충성된 증인”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신실한 증인’이라는 의미로 같은 말이다. 시편 89:19-20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대적들을 다스리는 ‘기름 부음 받은 왕’으로 다윗을 세우셨다고 밝힌다. 요한 사도는 이러한 구약의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다윗 언약 안에서 영원한 왕권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사 43:10-13)이 예수 그리스도로 언약이 성취되었다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 18:37)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신실한 증인이심을 드러내셨고 또한 죽음 가운데 있는 자들에 대해 통치권을 가지신 장자이시다. 이런 점에서 “땅의 임금들”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세력을 의미한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9)라고 하였다. 결국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5절)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우리”란 단순히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다고 해서 자신을 “우리” 안에 포함시킬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에 의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부르심을 받아 죄에서 벗어남을 받은 자이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6절)라고 하였다.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것은 ‘왕국이 곧 제사장’이라는 뜻이다. 출애굽기 19:5-6에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라고 하신 말씀대로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다(벧전 2:9).

그러므로 “은혜와 평강”이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은혜와 평강”이란 습관적인 말로 하는 인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자격 없는 자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생명의 은혜이고, 그 은혜가 베풀어진 상태가 평강이다. 평강이란 전쟁을 전제한 표현이다. 즉 하나님의 대적자가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한몸된 평강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초대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은 ‘은혜와 평강’이라고 문안 인사를 하였다. 관심사가 은혜와 평강에 있다는 뜻이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딤전 1:2, 딤후 1:2, 딛 1:4, 몬 1:3, 벧전 1:2, 벧후 1:2, 요이 1:3 등).

그래서 성도가 묵시를 산다는 것은 이미 끝난 세상으로 보고 이 땅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여전히 이 땅에 살고 있다는 현실이다. 이 땅에 산다는 것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세상의 원리와 법칙을 좇아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속세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땅의 것에 의미를 두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자가 왕국이요 제사장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죽음으로 왕국이요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께만 영광과 능력이 있다. 그의 피에 굴복된 자가 왕국이요 제사장이며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이다(2022082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