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영대 목사 (주성교회)/요한계시록 강해

강론1.요한계시록 1:1-3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Hebrew 2022. 11. 6. 14:15

요한계시록은 요한 사도가 밧모 섬에서 편지 형식으로 기록한 계시의 글이다(1:9).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이다. 그렇다면 묵시의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이해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의 관심은 여러 가지로 분산될 수 있다. 예컨대 요한이나 혹은 천사, 하나님 나라의 재료나 모습, 또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고 대비하고자 하는 것에 더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창세기를 창조론의 관점에서만 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우주 종말론으로 결론 지을 수밖에 없다. 창세기를 창조론으로 보면 제대로 해석할 수 없듯이 요한계시록 역시 흔히 말하는 종말론의 관점을 가지고 미래에 일어날 일로만 본다면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1절). 우리 성경의 어법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고 하였는데 헬라어 성경의 첫 단어가 ‘아포칼립시스’, 즉 “계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것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라는 뜻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라고 말씀하여 계시의 원천이 하나님이라고 밝힌다.

실로 요한계시록(이라 쓰고 예수 그리스도 계시록이라고 읽는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를 주시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로 충만하다. 흔히들 요한계시록을 미래에 일어날 비밀을 푸는 것처럼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라면 이것 자체가 ‘복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고자 할 때 신기한 호기심으로 비밀스러운 것을 암호 풀 듯이 풀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복음 자체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5-27)

 

 

“신비의 계시”란 ‘비밀의 계시, 묵시’라는 말이고 그것이 곧 복음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감춰진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고 보여주시는 것이기에 계시이고 묵시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묵시’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출애굽기의 말씀을 통해 생각해 보자.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13 모세가 그의 부하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14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 하리니 무릇 일이 있는 자는 그들에게로 나아갈지니라 하고 15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16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17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출 24:12-18)

 

 

모세가 산 위에 올라 언약의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산을 가리셨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간 산 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하는 산 아래를 구름으로 구분하셨다. 즉 산 위 하늘의 세계와 산 아래 땅의 세계를 구분하신 것이다. 산 위 하늘의 세계가 묵시의 세계이고 산 아래 땅의 세계가 역사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전한 율법은 묵시를 언약의 말씀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산에 오르셔서 영광중에 변화되어 모세, 엘리야와 나눈 대화가 “예루살렘에서 별세(헬, 엑소도스) 하실 것”(눅 9:31)이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임을 나타내셨다. 모세는 40일 산 위에 있었고 예수님은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셨고 40일 후에 승천하셨다. 성경에서 40이란 수는 옛 세계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새로운 세계로 전환되었음을 나타내는 수이다. 모세를 통해 보여주신 하늘의 세계, 묵시의 세계가 이 땅 역사의 세계에 드러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신 사건이다.

이 땅의 어떤 것도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존재는 하나님만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 세계는 존재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분리해서 존재할 수 있는 피조물은 없다. 묵시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전제를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묵시’ 혹은 ‘계시’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드러나다, 덮개를 벗긴다, 폭로한다’라는 뜻으로 없는 것을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감춰져 있고 덮어져 있는 덮개를 치워 드러내 보인다’ 또는 ‘비밀스러운 것을 폭로한다’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정하신 것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완성된 것을 역사 속에 말씀으로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래서 홀로 존재하신 하나님의 말씀만 묵시이고 계시이다. 하나님의 창조란 이런 의미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역사란 하나님의 묵시, 계시를 펼쳐내시기 위한 현장으로 주신 것이다.

그래서 완전한 비유는 될 수 없지만 ‘접는 부채’로 비유할 수 있다. 묵시와 역사에 대한 완전한 설명이 될 수 없고 부족한 면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비유 중에서 가장 적절하게 들 수 있는 비유라고 생각된다. 부채를 펼쳐 놓으면 부채에 그려진 그림이 다 보이지만 접으면 그 그림은 접어진 부채 안에 다 들어가 하나가 된다.

나의 구원, 나의 행복, 내가 하나님을 믿어 천국 간다는 것 등 이 모든 것들은 묵시의 본질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모든 종교 생활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역사 자체에 매이는 것이기에 표면적이고 껍데기에 불과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장소나 시간에 매이는 것이 종교 행위이고 우상이라고 성경은 단언한다. 하나님의 창조를 이런 차원에서 생각하자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내시는 것이 창조이고 창조의 세계를 통해 역사라는 현장에서 하늘의 세계, 묵시를 드러내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다윗은 언약 안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1-4)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현장이 역사이고 그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심으로 죄의 권세에 매인 땅의 세계와 대조된 묵시의 세계,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늘의 아들들을 만들어 내시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성도라는 존재가 하늘에 있다가 인생으로 내려와서 다시 다음 생으로 올라가는 그런 윤회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창세 전 언약 안에서 아들들이 있다는 말 역시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완료된 것이라는 뜻이다(약속이 존재의 시작이며 완성이다). 바울 사도가 선포한 에베소서의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주어진 것이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그러기에 묵시란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시간과 공간이 주어진 역사 속에 드러내시기 위해 천지 창조를 하셔서 그 속에서 하나님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의 수준과 언어로 나타내신 것이다(물론 이것조차도 죄의 권세에 매인 자들은 알아먹지 못하기에 성령님을 통해 진리를 알게 하셔야 되는 문제였다). 이런 점에서 죄라는 것도 하나님의 의를 알리고 드러내시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하나님만 존재이시라면 죄의 권세에 매인 자들은 없음에 불과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예정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겨냥한 것이었고, 묵시를 보여주고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시간이고 역사이다. 결국 역사란 긴 기간이 아니라 인간의 죄의 깊이를 보여주는 역사를 통해 묵시의 세계를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내시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무수한 심판과 선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성된 아들들을 창조하시는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창조이다. 다시 말하면 그 아들들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의 존재가 존재이다. 잠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여기서 ‘방자히 행한다’라는 히브리어 ‘파라’라는 말은 ‘내버려 두다’라는 뜻이다. 즉 하늘의 묵시가 주어지지 않는 것 자체가 버려두심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이기에 율법(묵시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새기는 자가 복이 있다는 뜻의 말씀이다. 한 마디로 묵시 안에 있는 것이 복이다. 그러기 때문에 묵시를 단순히 공간적인 다른 차원을 말하거나 무시간적인 영원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묵시 속에 있던 내가 세상 속에 내려왔다든지 죄가 묵시 속에 있었는데 그것이 때가 되어서 드러났다는 그런 의미가 결코 아니다. 공간적 이동이나 영원 속에 있던 내가 시간 속으로 왔다는 생각 자체가 비성경적이다. 더구나 지금의 나와 이어지고 통하고 있다는 말은 이방 종교의 윤회설이나 물리학에서 말하는 양자역학 같은 것이지 성경의 창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런 모든 생각들이 자기중심의 죄인이 구원을 탐하기 때문에 나온 발상이다. 히브리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란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주신 것이고 또한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의 계시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으로 주신 것과 또한 그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십자가의 대속을 이루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계시이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서 “속히 일어날 일들”이라는 것도 묵시의 관점에서 보자면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이 완료된 의미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요한계시록은 앞으로 될 일에 대해 계시로 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십자가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이 말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란 앞으로 더 밝혀져야 할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약속대로 성취되어 다 드러난 복음을 의미한다. 성도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묵시 안에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2022080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