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영대 목사 (주성교회)/요한계시록 강해

02. 요한계시록 1:1-3 때가 가까움이라

Hebrew 2022. 11. 9. 10:51

요한계시록 1:1-3

때가 가까움이라

 

 

인간은 생래적으로 자기 행위를 기준으로 성경을 본다. 무엇을 하며 어떤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갈까를 생각한다. 하나님을 섬긴다기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 나와서 성경이 무엇이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기 이전에 소위 말하는 교회의 경전이라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찾는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다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들은 교회에 목사를 성경 해석하는 전문가로 세워 놓았으니 그에게 의존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하여 전하는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한다. 다른 말로 하면 목사의 설교를 계시의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경과 말씀, 교회와 목사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이런 식이다 보니 전부 외형적인 것에 매여 종교 생활을 하면서 자기 행위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목사의 설교 말씀을 잘 듣고 지켜 행하면 복 받는 것을 복음으로 이해한다. 그러다 보니 성경 읽기, 기도, 십일조, 헌금, 전도, 교회 봉사, 구제 이 모든 것에 열심을 더하는 것이 천국을 쟁취하는 방법이 되었다. 결국 천국에 대한 탐심으로 가득한 십자가의 원수된 자로 멸망의 길을 갈 뿐이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이성으로 이해하고 행동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행위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알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시는 은혜가 입혀져야 한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표현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강론에서 계시, 즉 묵시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누었다. 묵시란 한마디로 하늘의 세계, 묵시의 세계를 이 땅의 세계, 역사의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드러내신 복음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 말씀 안에서 이미 완료된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도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더 밝혀주는 메시지로 보고 우리가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대로 성취되어 다 드러난 복음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1절을 다시 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1절).

여기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란 직역하면 ‘반드시 신속하게 되어져야만 하는 것들’이라는 말이다. “반드시”라는 말의 헬라어 ‘데이’는 ‘반드시 ~해야 한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당위성 또는 필연성을 나타내는 말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강조하는 뜻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하)고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하고 (반드시)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 16:21 / 참고 막 8:31, 눅 9:22, 24:7)

 

 

우리 성경에서는 번역상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언급할 때 공통적으로 ‘반드시’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임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었다는 것은 반드시 확실한 성취를 동반한다. 그러므로 “속히”(헬, 타코스)라는 말은 묵시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서 완전한 성취를 이루신 것을 역사의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을 더 분명하게 확증해 주는 표현이 “일어날 일들”(헬, 게네스다이)이란 말인데 ‘되다’(헬, 기노마이)의 수동태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발생되는 일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일하신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는 다니엘 2장을 배경으로 한 말씀이다.

 

 

28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날들의 마지막)에 될 일(반드시 되어져야만 하는 것들)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은 이러하니이다 29 왕이여 왕이 침상에서 장래 일(반드시 되어져야만 하는 것들)을 생각하실 때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장래 일(반드시 되어져야 것들)을 왕에게 알게 하셨사오며(단 2:28-29)

 

 

다니엘서 2장은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아무도 해석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해 그 꿈의 의미를 계시해 주신 내용이다. 은밀한 것들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드러내시는 분이고 그 비밀은 반드시 되어져야 할 것들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2:44에서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라고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멸하시고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요한 사도는 구약의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낸다. 1절에서 속히, 3절에서 가까움이라는 표현을 통해 단순히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구약의 언약에 대한 성취가 신속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이루어졌다는 것과 그 효과가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국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란 다니엘서에서 예언된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한마디로 요한계시록을 묵시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다 이루어진 것이고 완성된 것이다.

그런데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천사”(헬, 앙겔로스)란 어떤 존재인가? 천사라고 해서 어떤 특별한 존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메시지를 전하는 사자(使者)의 역할을 하는 존재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런 표현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치 느부갓네살에게 다니엘을 보내셔서 계시를 전달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를 나타내시고 또한 천사가 요한에게 계시를 전하여 나타내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종들”이란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자면 요한 사도가 포함된 교회 공동체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그래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2:7,11,17,29 3:6,13,22)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2절)라고 하였다. 요한 사도가 보고 들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다. 구약에서 이미 계시된 언약이고 그것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이 요한계시록이다. 요한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기한 것과 미래의 일들을 모조리 다 보았다고 착각하지 마시라.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것 또한 그 약속대로 십자가에서 온전히 성취하신 것에 대해서 보고 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자기 자신이나 체험을 증언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모자라는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생명을 누리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하고 완벽하게 나타내 주셨다. 부족한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추가해야 할 것이 없기에 우리에게 있어서 다른 계시란 있을 필요가 없다. 성도는 묵시 안에 있으므로 기록된 말씀을 통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상태에 있다.

그래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3절)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도 자주 곡해되어 인용되는 경우들이 많은데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면 복이 있다든지 아니면 읽는 것과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삶에서 지키는 것까지 하는 자가 진정 복된 자라는 식으로 이해한다. 이런 이해는 인간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에 불과하다. 본문은 읽는 자와 듣는 자 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를 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 사도가 본 서신을 기록할 당시에 성경은 우리처럼 이렇게 책으로 되어서 모두가 다 가지고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임 시간에 앞에서 한 사람이 두루마리나 파피루스로 된 성경을 읽었고 회중들은 그것을 들었다. 그래서 “읽는 자”(헬, 아나기노스코)는 단수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 성경에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따로 있는 것처럼 이해되도록 번역되었는데 직역하면 “듣고 지키는 자들”이라는 말이다(‘지키는 자들’이 복수이다). 듣는 것이 지키는 것이다.

“지키는 자”란 흔히 교회들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행위로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에 새기고 품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여기서도 “이 예언의 말씀”이라고 하니까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신 것이 요한계시록 말씀이라고 착각하는데 “예언의 말씀”이란 ‘맡겨주신 말씀’이라는 뜻이다. 즉 요한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몸된 교회에 전하신 모든 말씀을 의미한다.

죄인은 말씀을 온전히 행위로 지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 품고 새기는 것조차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 없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복 없는 존재란 달리 표현하면 저주와 멸망 가운데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와 대조되어 말씀을 온전히 지키신 분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신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 성경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의로운 죽음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해 죽는 대속의 죽음이었다고 밝혀주고 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갈 1:4-5)

 

 

그러기에 진정 복 있는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 있는 자가 된다는 것은 오직 그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 십자가에 근거하여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들 마음에 말씀을 품고 새기게 하신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것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고 하였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신령한 복”이란 영적인 복, 즉 성령님에 의해 주어진 복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란 단순히 성경을 읽는 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말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창세 전의 비밀을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계시해 주신 것, 그 안에 있게 된 것이 복이다. 즉 언약의 복이 완성된 상태 안에 있는 복이다.

그래서 “때가 가까움이라”라고 말씀한다. “때”(헬, 카이로스), “가까움”(헬, 엥귀스)이란 시간과 공간적으로 가까운 상태를 의미하는 말인데(빌 4:5, 엡 2:13) 단순히 근처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고 그 안에 거하는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막 1:15)라는 말씀이 성취된 상태이다(갈 4:4, 엡 1:9). 이 말씀 앞에 우리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가르’, 즉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있다. 말씀을 읽는 자, 듣고 지키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된 복 안에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하나님의 때(묵시) 안에 있기 때문이다(2022081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