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영대 목사 (주성교회)/요한계시록 강해

09. 요한계시록 2:8-11 서머나 교회

Hebrew 2022. 11. 9. 11:17

요한계시록 강론 09

 

요한계시록 2:8-11

서머나 교회

 

 

우리는 땅의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의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진리를 안다고 떠벌린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을 사는 것이 끝없이 허상을 좇아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씀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2-3)라고 하였다.

눈에 보이는 땅의 것은 잠깐이나, 보이지 않는 위의 것은 영원하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모든 것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고 하늘의 것이 실상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은 허상에 붙잡혀 사는 존재라는 뜻이다. 하나님에 대한 많은 가설들, 여러 가지 철학들, 갖가지 자기를 주장하려고 내세우는 사상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로 발생 된 온갖 문화들이 허상이라고 성경은 알려준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인간들의 사고 체계 안에서는 밝혀질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이 땅의 것으로는 진실이 제대로 드러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땅은 죄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럽혀졌거나 흠집 난 정도가 아니고 아예 죄에 의하여 그리고 죄를 위한 것만 만들어 내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다. 그러기에 외부에서 누군가 실상을 알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일생을 허상 가운데서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오신 분이 실상을 드러내 주셔야 우리는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말씀으로 주셨다. 1:1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의미는 묵시의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온전히 성취되어 다 드러났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만 실상이다. 이제 언약의 당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우했느냐 하는 것이 심판하시는 기준이 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실상이 밝혀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교회에 말씀하신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일곱 교회에 대하여 칭찬을 하거나 책망을 한다는 차원으로 볼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고 그 몸에 합당한가 아닌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찬 혹은 책망 이런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어떤 기준이 있다는 뜻이다. 그 기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우리 교회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모습인가 아닌가 하는 점검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상을 제대로 드러내시는 주의 날에 요한과 같이 죽은 자와 같이 되어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로서 교회인가를 늘 자문해야 한다.

요한 사도에게 주신 이 계시를 통해 모든 실상을 밝혀주신다. 악의 실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본질을 드러내신다. 이 상태를 성경은 종말이라고 말씀한다. 종말의 때에 교회의 모습은 말씀에 의해 가짜와 진짜의 모습이 매일 드러나게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빗대어 가짜 교회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시는 때가 종말이다. 지금도 주께서 늘 허상과 실상을 이 세상에 드러내시고 자신의 몸의 본질을 말씀으로 알려주신다.

8절에 보면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대하여 자신을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나타내셨다. 창조하신 분이 완성하시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 창조를 이루신 주인의 말씀이다. 따라서 이 땅의 모든 역사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실상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어서 주님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라고 지적하신다. 주님께서는 성도의 환난과 궁핍을 아시고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신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도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풍부함이요 부요라는 것을 말씀하셨다(눅 12:15,21). 그러므로 “환난과 궁핍”이 “부요”라는 뜻이다(히 10:34).

종말의 때에 있는 이 땅의 교회는 바로 이런 식으로 허상과 실상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한국교회가 썩었다’ 혹은 ‘건강한 교회로 세우자’라고 할 수 있는가? 부패하고 썩어 건강하지 못한 교회라면 애초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로써 다스리시는 교회가 타락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결코 권력 누수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주님은 처음부터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철저히 자신의 말씀대로 이루신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이란 단순히 유대인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들이나 율법에 매여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이었다. 늘 표적을 구하며(요 2:18, 고전 1:22)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여(요 6:16) 대적하는 자들의 대표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라고 밝힌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썼다.

 

 

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살전 2:15-16)

 

 

그런데 문제는 그들에 의해 주님의 교회가 핍박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언제나 사탄의 모임에 의해 고난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10절)라고 말씀한다.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한다고 해서 고난이 두렵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귀가 성도를 감옥에 넣어 시험을 한다고 할지라도 고난이 두렵지 않은 상태로 만드신다는 뜻이다.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라는 말씀은 다니엘과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에게 시험을 당했던 기간으로 우상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기간이었다(단 1:12-15). 따라서 십 일 동안의 환난이란 정확하게 십 일 동안만 환난이 있다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무한정의 기간이 아니다. ‘10’이라는 완전수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완성된 교회가 환난으로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면 환난을 받는 기간 동안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어떤 모습인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라는 것이다. 새로운 집사 직분 임명을 하거나 장로 장립식이나 목사 임직식에서 이 구절을 가지고 교회에 열심히 충성 봉사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죽을 정도로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라는 것이 아니다. 직역하면 ‘죽음으로 믿음이 되라’라는 말이다. 환난이 와도 성도는 믿음으로 살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곧 죽음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송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신다는 말씀은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상태가 이러하다는 뜻이다(요 17:18, 20:21).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서 천국을 선포하고 드러낸다고 해서 이리가 양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열두 사도를 보내신 것은 이리에게 잡아 먹히도록 보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진리로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을 죽이듯이 같은 이름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죽인다. 그것이 진리를 대하는 죄인들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교회요 성도가 사탄의 회로부터 핍박을 받을 때 주께서 그 환난에서 건져주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믿음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믿음을 온전히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된 것은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이다(롬 5:5).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심판의 기준이다. 성도에게 심판이란 십자가 죽음에 합류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자신을 드러내셨던 것이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그러면 “생명의 관”이 무엇인가? “관”(헬, ‘스테파노스’)이란 ‘왕관, 화관’을 의미한다. 흔히들 교회에 죽도록 충성 봉사하면 하늘나라에서 금으로 된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을 것이라고 이 말씀을 곡해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열심히 충성 봉사한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금관을 쓰고 그렇지 못한 자는 구원은 받지만 개털 모자 같은 것을 쓴다는 만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11절을 보면 그 진의를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한다. 둘째 사망이란 마귀와 그의 모든 추종자들을 온전히 멸하는 최종적인 파멸을 말한다(계 20:6, 14, 21:8). 그래서 12:11에서도 이렇게 선언한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1)

 

 

우리가 생명으로 알고 있는 허상의 생명(목숨)을 잃으면 실상의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관”이란 둘째 사망에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생명을 누리는 구원을 표현한 말이다. 에베소 교회에 주셨던 말씀대로 하자면 생명 나무를 먹는 것이다(2:7). 장차,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복을 누리는 자들이 교회요 성도이다. 그러므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관을 받은 자들이 교회이다.

오늘 우리가 교회로 모이게 되었다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주신 면류관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면류관이다. 생명의 관을 십자가 은혜로 받은 자들이 모여서 자기 면류관을 자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롬 3:22). 성도가 누리는 생명은 자기 공로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목숨은 생명이 아니라 허상일 뿐이다. 죽음이 담긴 이 육체 안에 은혜로 생명을 넣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만 실상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상을 통해 가짜 교회들은 들통이 난다. 가짜 교회는 자칭 유대인이고 사탄의 회당이 되어 복음을 밀쳐내고 진짜 교회를 거부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교회는 언제든지 말씀에 의해 복음을 알아듣는 ‘너희’와 복음을 거부하는 ‘그들’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 되어 죽는 것을 부요함으로 여기는 존재이다. 그것이 이 종말의 때에 이기는 자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또한 심판에 동참한 자가 선포하는 책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은 자에게 받아들여지는 계시이다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2-33)

 

(2022100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