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영대 목사 (주성교회)/창세기 강해

11. 창세기 2:1-3 하나님의 안식

Hebrew 2023. 4. 17. 21:12

창세기 2:1-3

하나님의 안식

 

 

여섯 날까지의 창조가 다 이루어지고 일곱째 날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내용이 오늘 본문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안식에 대해 말씀하시고 일곱째 날을 복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 자체를 복 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으니 날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대부분의 장로교회가 표준 문서로 인정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보면 이렇게 언급한다.

 

21-7.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위하여 적당한 분량의 시간을 구별해 바치는 것은 자연 법칙에 합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적극적이고 도덕적인 영구한 명령으로 요구하신 것이 있으니, 곧 모든 시대의 인류로 하여금 이레 중 한 날을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히 지키도록 하신 것이다(출 20:8,10,11, 사 56:2,4,6,7). 이 안식일이 창세 이후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이레 중 마지막 날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활 이후부터는 이레 중 첫날로 바뀌었다(행 20:7, 창 2:2-3, 출 31:17, 고전 16:1-2) 이 날을 주일(主日)이라고 하며(계 1:10), 이 날은 그리스도 교회의 안식일로서 세상 끝날까지 계속 지켜져야 한다(마 5:17-18, 출 20:8,10).

 

그래서 유대인들의 안식일 토요일이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오늘날은 일요일로 바뀌어 주일이라 부르고 그 날을 거룩하게 여기고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듯이 그렇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뜻이 애초에 일요일에 있었다면 처음부터 일요일을 주의 날이라고 말씀하셨다면 좋지 않았을까? 이렇게 본다는 것은 제도권 교회 안에서 전통적으로 성경을 그저 문자 그대로 보아온 것에 불과한 역사이다.

 

사실 “날”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욤’이라는 단어인데 그 뜻이 여러 가지이다. 즉 ‘24시간의 날, 날, 하루, 막연한 때, 기간, 시간의 한 지점’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전통적인 개혁주의 교회들은 대체적으로 24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성경 전체적인 관점에서 말씀을 따라 살펴보고자 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1-2절). “다 이루어지니라”라는 말씀은 ‘완료되다, 완성하다, 결국에 이르렀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일곱째 날”(히, 욤 셰비이) 다 이루어 완성하심으로 모든 날들은 “일곱째 날”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만물”이란 히브리어로 ‘웨콜 체바암’이라는 말인데 원형이 ‘차바’라는 단어로 민수기 31:27에는 ‘군인들’로 하나님의 보좌에 둘러선 무리들이라는 의미로 ‘만군’(萬軍)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래서 “만군의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성경 곳곳에 표현되었다(삼상 1:3,11, 4:4, 15:2, 17:45 등). 즉 하나님께서는 피조 세계를 자신의 군대로 삼으신다는 의미로 나타내고 있다.

일곱째 날이 이르기 전에 성경은 계속 날을 말씀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욤 에하드)이니라(1:5)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욤 쉐니)이니라(1:8)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욤 세리쉬)이니라(1:12-13)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욤 레비이)이니라(1:18-19)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욤 하미쉬)이니라(1:22-2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욤 하쉿쉬)이니라(1:31)

 

 

여기서 우리가 의문을 가지고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왜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니’가 아니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고 표현한 것일까 하는 것이다. “저녁”이란 히브리어로 ‘에레브’인데 ‘섞다, 교환, 무역’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욥기 7:4에서는 ‘밤’으로 번역하였다. 어둠의 시작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첫째 날에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5절)라고 하였다. 이때 “낮”이 히브리어로 ‘욤’이다. 즉 ‘날’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단어이다. 낮이 날이다.

 

밤은 실체가 온전히 다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다. 창세기 29:25에 보면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창 29:25)라고 말씀한다. 야곱이 밤에 몰랐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즉 실체가 다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 아침이 되어서야 분명히 실체가 드러나고 그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침”이란 광명이 임하는 시점으로 낮의 시작이다.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에서 도주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때 에서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밤에 얍복 나루터에서 에서를 위한 예물을 선택하고 밤에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얍복강을 건너게 한 후 야곱은 홀로 남았다(창 32:13, 21-23).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창 32:24-31)

 

 

이스라엘은 밤에 형성된 민족이다. 즉 어둠의 상태에 있던 존재라는 의미이다. 야곱이라는 어둠에서 건져내어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로 낮의 백성으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날이 새어가는 아침에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단순히 이름이 주어졌다는 말이 아니라 아침에 야곱과 야곱의 가족이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즉 사람과 상대하고 사람을 속여 쟁취하는 야곱이 아닌 하나님과 상대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말씀 안에 있게 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라고 고백하였다. 그것이 생명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은 창조의 상태가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상태에서 그 어둠의 실체가 아침(낮)이 되어 온전히 다 드러날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일곱째 날에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라는 표현이 없다. 일곱째 날에 하나님의 안식으로 다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첫째 날”(욤 에하드)이라는 표현이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에하드’라는 단어는 서수가 아닌 기수로 ‘하나, 일’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날부터는 서수로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로 표현된다. 첫째 날을 제대로 표현하자면 ‘한 날’ 또는 ‘하나의 날’이라는 뜻이다. 7일 전체가 이 한 날로 대표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7일은 안식으로 완성되어 한 날이 된다는 뜻을 지닌다. 그래서 여섯 날이 일곱째 날 안식이라는 한 날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차 독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출애굽기에 이렇게 말씀한다.

 

 

15 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방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되 16 길이와 너비가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17 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18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19 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20 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다 금 테에 물릴지니 21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보석마다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출 28:15-21)

 

 

여기서 “첫 줄”이라는 말이 ‘에하드’이다. 즉 ‘한 줄, 하나의 줄’이라는 말이고 그 다음부터는 서수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줄로 표현하였는데 한 마디로 한 줄을 네 번 반복함으로 하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흉패에 붙인 보석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하나님의 한 언약 백성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언약의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즉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것이 구원이고 언약의 성취이다.

그러므로 “날”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담고 있고 그 언약을 ‘7’로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서 ‘칠, 일곱’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일하심, 언약의 완성을 설명하고 보여주는 숫자이다. 그것이 바로 “안식”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3절)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가지고 단순히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고 거룩하게 하셨으니 날 자체가 거룩하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문자적으로 보고 문자에 매인 결과이다.

결국 “일곱째 날”은 여섯 날의 한 날, 한 날을 일곱 번 반복하여 표현함으로 첫째 날이 아닌 ‘한 날, 하루의 날’을 통해 낮이라는 빛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이렇게 선언하셨다.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2-24)

 

 

또한 일곱째 날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통해 성경이 말씀하는 안식이란 단순히 하나님이 쉬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언약이 온전히 성취되며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8:1에서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라고 언급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성하신 안식을 보여준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안식을 온전히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다.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6-18)

 

 

(2022081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