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영대 목사 (주성교회)/창세기 강해

13. 창세기 2:7-9 사람과 에덴

Hebrew 2023. 4. 17. 21:15

창세기 2:7-9

사람과 에덴

 

 

에덴 동산은 어디에 있을까? 적어도 기독교 신앙을 가지거나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관심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에덴 동산의 위치를 찾기 위해 노력을 한다. 비손강과 기혼강은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유브라데(유프라테스)강의 위치는 아니까 티그리스강을 힛데겔강으로 추측하여 지금의 이라크나 터키 근처 어딘가에 흔적이 있을 것이라고 아직도 찾는 고고학자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지금 그 위치를 찾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 그 위치를 안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흔적을 찾아 위치를 안다면 성경의 내용이 확실한 사실이라고 더 분명히 믿을 수 있는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창조를 말씀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위해 밑그림을 주신 것이라고 우리가 확인하였는데 2:4에서 ‘톨레도트’로 그 상세한 역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인 계시를 주시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것은 지구상 어디에 에덴 동산의 흔적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고 있고 완성되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성경은 단순히 나의 구원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2:7 이하에서는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에덴 동산에 두셔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하시는가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선 2:7-9에서 사람을 지으시고 에덴 동산에 두셨는데 거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린다. 그리고 10-14절을 통해 에덴 동산의 근원이 되는 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다시 15-17절 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나무에 대한 이야기 사이에 강에 대한 이야기가 끼어 있는 구조이다.

 

그렇다면 동산 중앙에 나무를 두셨다는 말씀은 단순히 위치상 동산 한가운데 두었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나무를 중심으로 일하시겠다는 뜻이다. 그 나무를 통해 지향하고 있는 것은 가운데 끼어 있는 강, 즉 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이미 1:2에서 하나님의 영이 물을 품고 일하시려는 의도를 이미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7절). 우리 성경에서 “사람을 지으시고”라고 번역하였는데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 때에 만드셨다’이다. 즉 땅을 섬길 온전한 사람이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지 않아 말씀의 은혜로 내리는 상태가 아니었을 그때 땅에서 취한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땅을 섬길 온전한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어로는 ‘에트 하아담’이라고 표현하였다. ‘그 사람을’이라는 말이다. 정관사를 붙이고 있는 이유는 특별한 어떤 사람을 지칭한다.

 

“땅의 흙”이라고 하였는데 ‘땅으로부터(민 하아다마) 티끌(아파르)’이다. 즉 ‘그 땅으로부터 취한 티끌’이라는 뜻이다. 궁극적으로는 땅이 내는 생물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취한 먼지, 티끌로 어떤 특정한 사람을 만드심으로 그 사람을 통해 진짜 사람이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하신다. 다시 말해서 첫째 아담(사람)은 두 번째 아담을 증거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 5:14)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라고 하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빚어놓고 그 코에다가 직접 숨을 불어 넣었다고 상상을 하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된 존재로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의미이다. “생기”란 히브리어로 ‘니쉬마트 하이욤’인데 ‘생명의 호흡’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생령”이란 히브리어로 ‘네페쉬 하야’라는 말인데 이는 이미 1장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바다의 물고기와 땅의 짐승과 같은 ‘생물’이라고 번역된 말과 같은 말이다. 즉 ‘살아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땅의 짐승과 같은 존재이지만 사람을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5-47)

 

 

그러니 이런 바울 사도의 선언을 보면 첫 사람 아담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첫 번째 사람은 살려주는 영을 증거하기 위한 생령이다. 살려주는 영을 보여주기 위해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뜻이다. 흙에 속한 자를 통해 하늘에 속한 자를 보여주신다. 그래서 첫째 아담은 선악의 나무를 취함으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죽은 자라는 말이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첫째 아담이 흙에 속했다는 것은 육에 속한 자로 육의 사람이다. 신령한 자, 즉 하늘에 속한 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 첫째 아담은 육의 사람으로 지음을 받았다. 결국 첫째 아담은 둘째 아담을 증거하기 위해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면 흙에 속한 자이고 육에 속한 자로 죽은 자에 불과하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살려주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를 육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관성 있게 하나님의 언약으로 보지 못하니 사람을 영혼과 육체, 혹은 영, 혼, 육체로 2분설이니 3분설이니 하는 이론에 현혹되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을 그렇게 구분하는 것이 아니 산 자와 죽은 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로 구분할 뿐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전인(全人)으로 말씀할 뿐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8절). 여기서 우리 성경에 “동방의”라고 번역하였는데 동쪽 어떤 장소에 에덴을 만드셨다는 뜻이 아니다. 히브리어 ‘미케뎀’이라는 말은 ‘동쪽에, 동쪽으로부터’라는 뜻이다. 즉 단순히 동방에 에덴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동방으로부터’ 분리하여 어떤 곳에 두셨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일차독자의 입장에서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일까?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성막을 지으면서 동방으로부터 어떤 위치에 에덴이 있다는 것은 성막의 입구가 동쪽으로 위치하고 있는 것에서 그 의미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성막 앞 동쪽 곧 회막 앞 해 돋는 쪽에는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진을 치고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성소의 직무를 수행할 것이며 외인이 가까이하면 죽일지니라(민 3:38)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창 4:16)

 

 

이 모든 말씀을 통해 성경은 동쪽에서 오는 것을 구원으로 설명하고 동쪽으로 가는 것을 하나님을 대적하고 멀어지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동방에서 박사들이 왔다는 것을 이방인들의 구원을 설명하는 메시지로 전한 것이다(마 2:1-12). 레위기 16장에 보면 대속죄일에 행하는 의식을 이렇게 기록한다.

 

 

7 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8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9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10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레 16:7-10)

 

 

두 염소를 회막 문에 두고 제비 뽑아 한 염소는 속죄제로 드리지만 한 염소는 광야로 보내는데 광야로 보낸다는 것은 성막이 있는 곳에서 멀리 동쪽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속죄의 의미가 성막에서 피 흘리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속죄와 관련이 없고 생명과 상관없는 상태가 동쪽 광야로 보내는 것으로 설명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것을 다윗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

 

 

“에덴”이란 ‘즐거움, 기쁨’이라는 뜻이고 “동산”이라고 번역된 말 히브리어 ‘간’은 ‘가난’에서 유래한 단어로 ‘울타리로 둘러싼 땅, 뜰, 정원’을 의미한다. 죄가 없는 상태라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울타리를 쳐서 구별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점에서 에덴 동산은 성막, 성전을 계시해 주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의미는 “창설하시고”라고 표현을 통해 더욱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 히브리어 ‘나타’라는 단어는 ‘심다, 고정시키다, 장막(텐트)을 치다’라는 뜻이다. 일차독자의 입장에서 성막과 관련된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이다(출 25:8-9, 출 33:7, 민 7:1). 그래서 요한 사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우리 가운데서 거하시매(장막을 치심)라는 출애굽 용어로 이렇게 전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9절). 우리 성경에는 “좋은 나무”라고만 되어 있는데 ‘모든 나무’라는 말이고 단수로 되어 있다. 직역하면 ‘생명 나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있더라’라는 말이다.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모든 나무를 통해 한 나무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생명 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한다.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1-2)

 

(2022082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