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영대 목사 (주성교회) 25

05. 요한계시록 1:9-10 주의 날 밧모 섬에서

요한계시록 1:9-10 주의 날 밧모 섬에서 사람은 누구나 다 어떤 글을 대하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한다. 심지어 번역이라는 것도 해석이 가미되기 마련이다. 책을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도 지은이의 의도를 완전하게 다 드러내서 번역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번역을 하면서 어떤 용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역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해석이 가미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본다고 할지라도 이미 내 안에서 해석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이해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기록된 말씀으로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를 죄인의 상태 그대로 두시지 않고 주의 영이..

04. 요한계시록 1:6-8 알파와 오메가

요한계시록 1:6-8 알파와 오메가 사람들이 역사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과거를 아는 것으로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생각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함으로 역사를 사유화하고 싶어 한다. 이는 역사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 놓으려는 모든 행위인데 한마디로 이름 남기기이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그 이름에 자신의 인격과 공로가 다 들어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날마다 최선을 다하는 인생으로 역사의 한 부분을 장식하려고 한다. 그러나 성도는 인간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고 흔적을 남기는 역사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의 존재라는 것이 성경의 선언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고 묵시를 사는 자이다. 세..

03. 요한계시록 1:4-6 그의 피로

요한계시록 1:4-6 그의 피로 성도란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내가 존재하고 있음에서가 아니라 없는 상태에서 불러내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다(롬 4:17).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라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함께 죽고 살리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죽은 자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산 자로 만드신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산 자는 날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 이것을 3절에서 “때가 가까움이라”라고 하였다. 헬라어 ‘엥귀스’라는 말은 공간적으로 근처에 서로 가까이 있다거나 시간적으로 가까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의 재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 아..

02. 요한계시록 1:1-3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 1:1-3 때가 가까움이라 인간은 생래적으로 자기 행위를 기준으로 성경을 본다. 무엇을 하며 어떤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갈까를 생각한다. 하나님을 섬긴다기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 나와서 성경이 무엇이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기 이전에 소위 말하는 교회의 경전이라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찾는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다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들은 교회에 목사를 성경 해석하는 전문가로 세워 놓았으니 그에게 의존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하여 전하는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한다. 다른 말로 하면 목사의 설교..

강론1.요한계시록 1:1-3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요한계시록은 요한 사도가 밧모 섬에서 편지 형식으로 기록한 계시의 글이다(1:9).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이다. 그렇다면 묵시의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이해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의 관심은 여러 가지로 분산될 수 있다. 예컨대 요한이나 혹은 천사, 하나님 나라의 재료나 모습, 또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고 대비하고자 하는 것에 더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창세기를 창조론의 관점에서만 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우주 종말론으로 결론 지을 수밖에 없다. 창세기를 창조론으로 보면 제대로 해석할 수 없듯이 요한계시록 역시 흔히 말하는 종말론의 관점을 가지고 미래에 일어날 일로만 본다면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